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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성경의 이해
· ISBN : 9791167270795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4-04-12
책 소개
목차
서문 ··· 3
제1장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야 하는 이유 ··· 17
제2장 하나님의 경륜과 시대에 따른 언약들 ··· 29
제3장 성경에서 가장 쉬운 난제 ··· 40
제4장 “과도기의 말씀들”이 나타나는 이유 ··· 52
제5장 “과도기의 말씀들”에 나타나는 경륜적인 특징 ··· 68
제6장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마태복음 ··· 85
제7장 “율법에서 은혜로” 전환되는 마태복음 ··· 100
제8장 “왕국에서 교회로” 전환되는 마태복음 ··· 115
제9장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 ··· 135
제10장 멀어져 가는 왕국과 경륜의 변화 ··· 153
제11장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경륜이 전환되는 사도행전 ··· 167
제12장 “베드로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사도행전 ··· 179
제13장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전환되는 히브리서 ··· 199
제14장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환란 시대 ··· 214
제15장 “새 언약,” New Covenant vs. New Testament ··· 230
제16장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전환되는 요한계시록 ··· 246
제17장 “환란에서 왕국과 영원 시대로” 전환되는 요한계시록 ··· 261
제18장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 ··· 273
책속에서
서 문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Study]』(딤후 2:15). 이 두 번째 구절은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공부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고, 공부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또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우선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생을 두고 “공부해야 할 대상”이 『진리의 말씀』(딤후 2:15)인 『진리의 성경』(단 10:21)이기에, 항상 배우고 공부해서 『진리의 지식』(딤전 2:4, 딤후 3:7, 딛 1:1, 히 10:26)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는 “공부”(study)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앞서 언급한 “디모데후서 2:15”이고, 다른 한 번은 “전도서 12:12”이다.『내 아들아, 이것들로 더욱 각성하라.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은 공부[study]는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 12:12). 여기서 말씀하는 “공부”는 디모데후서 2:15과 달리 “세상적인 지식을 쌓는 공부”를 가리킨다. 정말로 “많은 공부”를 하기 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aedia Britannica>을 공부해 보라. 1768-1771년에 전체 3권, 2,689페이지의 분량으로 초판이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증보를 거듭하여 1974-2012년에 전체 32권, 32,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제15판이 출간된 이 책은 엄청난 양의 정보와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글을 기고한 4천여 명의 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말해 주지 않는다. 이렇듯 “진리의 말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많은 공부”는 눈을 쇠잔하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만들 뿐,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지식의 증가”야말로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단 12:4), 인류는 이런 지식을 통해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는데, 이런 “세상적인 지식들”은 죄인들을 지옥에서 건져 내지 못한다.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수도 없다. 이 땅에 “영원한 왕국”과 “지상 낙원”을 마련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기쁨”도, “영원한 평화”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생명 연장”은 물론,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무궁토록 통치』(계 22:5)하며 살게 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딤후 2:15)받기 위해서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물론, “현 세상”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데메트리오』처럼 『진리 그 자체로 좋은 평판』(요삼 1:12)을 받아야 한다. 『좋은 평판[good report]』은 일종의 “좋은 보고서”(good report)를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모든 것의 심판자』(히 12:23)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제출된 보고서의 점수가 좋지 않으면, 그 『회계』(빌 4:17)와 “결산”의 자리는 최악의 부끄러운 자리가 될 것이다. “좋은 보고서”를 제출하려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한편 1885년 이후의 모든 “영어 번역본들”(“뉴킹제임스성경” 포함)을 위시하여 대다수의 한글 성경들은 디모데후서 2:15을 변개시킴으로, 성경에서 “성경을 공부하라”는 유일한 명령을 파괴시켰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개역한글판성경).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개역개정판).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쳐서」(쉬운성경).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표준새번역). 「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진리의 말씀을 옳게 다루어서]」(NIV). 변개된 성경을 쓰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데 “게으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부하라”는 명령이 삭제되었으니, 성경을 공부할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1994년)을 흉내 내면서 “개역개정판”과 제도권 교회들에 빌붙어 있기 좋아하는 정동수의 “흠정역”은, 동일한 영어 단어 “study”를 전도서 12:12에서는 「공부하는」으로 번역한 반면, 디모데후서 2:15에서는 「연구하라」로 번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성경 공부”를, 마치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 신학교 교수 같은 자들만의 “연구 과제”처럼 만들었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성경 공부 의무”에 관한 “면제권”을 부여했다.
“흠정역”에 사용된 단어들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번역한 <루터성경>의 독일어 “호크도이치”(Hochdeutsch, 독일의 일반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또는 언어적인 뉘앙스)와 거리가 멀다. 신약 성경 원문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 “시장 거리” 같은 곳에서 사용되는 평민들의 언어 또는 어감)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흠정역”의 언어는 지극히 학문적이고 사전적인 언어로 그 언어가 대부분 살아 있지 못하고 죽어 있다. 이런 이유로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는(Soul Winning) 복음 전파자들 중에는 “흠정역”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로 믿는 사람이 없다! “죽은 성경”은 한 명의 “혼”도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는(잠 11:30) “구령자”도 양성하지 못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 “원천 언어”에서 “수용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 오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이를 위한 첫 번째 원칙이 “철저한 직역”이다. “직역”은, “원천 언어”로 된 말이나 글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지, 단순히 어휘 하나하나를 “사전적인 의미”에 맞게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옮겨 놓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원천 언어”인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어휘를 “수용 언어”인 “한글”로 옮겨 올 때, <킹제임스성경>의 각 어휘에 담겨 있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그 성경의 “원천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의미를 온전히 전수했기 때문임), 그 의미에 맞는 적절한 “한글 어휘”를 선택하여 성경 안에 올바르게 옮겨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해야 “성경은 성경다운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여기에서 “성경답다”는 말은, 성경 문체의 특징은 물론, 수용 언어의 특징이 잘 살아 있어야 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정서와 정감이 성경을 읽는 “원어민”에게 “읽는 즉시, 그 언어의 본래 뜻,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고스란히 전달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원천 언어를 수용 언어로 옮겨 놓는 과정에서 생기는 “언어적인 간극”을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온전히 극복하고, 그 나라의 고유 언어로 “생동감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 안에 “번역된 어휘들”은 효과적으로 살아 역사하지(살전 2:13) 못한 채 죽어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욥 23:12)이고『빵』(눅 4:4)인데, 어떤 맛도 나지 않는 “음식”과 “빵”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번역할 수 있지만, “아무나” 번역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어느 누구에게든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권리”를 “아무에게나” 부여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실 경우 사람들은 어떤 성경을 사용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성경을 올바로 공부하여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바르게 보존된 성경”이 필수이다! “개역한글판성경”과 “개역개정판” 같은 “변개된 성경들”이나 “흠정역” 같은 “짝퉁 성경들”로는 성경을 올바르게 배울 수 없다. 배운다 해도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딤후 3:7) 없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속에서 그 나라, 그 민족의 언어로 온전히 보존해 주신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시고 그 권위를 인정하신 성경이 있어야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상의 요구들”을 온전히 충족하고 있는 성경은 <한글킹제임스성경>밖에 없다! 그 이유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말씀보존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제359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 이유”(pp.22-27)와 제373호, “<한글킹제임스성경>만 진짜 성경인 이유”(pp.25-30)를 참고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데, 『올바로 나누어[rightly dividing]』(딤후 2:15)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은 “성경 공부의 제1원칙”이다. 왜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해야 하는가? 성경이 “친히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매 본문마다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시대”와 “대상”을 나누고 있다. 우리가 공부해야 할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한 가지 시대” 또는 “한 가지 대상”만을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일곱 혹은 여덟 가지”로 구분되고, “대상” 또한 “세 부류”(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 고전 10:32)로 나뉜다. 보다 더 자세한 공부를 위해서는 “클라렌스 라킨” 목사의 <세대적 진리>, “피터 럭크만” 목사의 <어떻게 성경을 가르칠 것인가>, “이송오” 목사의 <열린 성경 닫힌 마음>을 참고하라. “성경의 기록자”께서 나누어 놓으신 원칙을 무시한 채 성경을 공부하면, 서로 상충되는 성경 구절들에 직면할 때 모순처럼 보이게 되어, 그런 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잘못 믿거나 아예 성경을 믿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나누되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는 것은, 성경이 이미 나누어 놓은 원칙들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믿고 수용하며, “있는 그대로의 원칙”을 따라 공부하라는 뜻이다.
또한 “올바로 나누되” 성경과 성경, 본문과 본문, 구절과 구절, 단어와 단어를 서로 “비교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13). 이렇게 비교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의 모든 단어와 구절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짝”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으라. 이것들 중에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하나도 자기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바로 나의 입이 명령하였고, 바로 그의 영이 그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그 “짝”은 완전히 “상반되는 짝”일 수 있고, 서로 “유사한 짝”이거나 완전히 “똑같은 짝”일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순서대로 “대조”(Contrast), “유사”(Similarity), “반복”(Repetition)을 활용하는 것만큼 “더 좋은 성경 공부 방법”도 없는 것이다.
우선 “대조”는 서로 같지 않은 것들, 곧 “조화를 이루지 않는 말씀들”을 서로 구분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같다고 하시지 않은 것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 이에 반해 “유사”는 서로 조화가 되는 “평행 구절들”을 모두 찾아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근거 구절로 활용하여 공부하는 방법이다. “반복”은 어떤 특정 본문이나 구절을 완전히 깨달아 알 때까지, 성경에 반복되는 본문을 중심으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 공부하고 외우는 것이다. 『명령을 명령 위에 반복해야 하고 명령을 명령 위에 반복하며, 줄을 줄 위에 반복하고 줄을 줄 위에 반복하여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니』(사 28:10). 실제로 성경은 특정 진리나 본문에 대해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대조,” “유사,” “반복”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서 공부할 때 매우 효과적인데, 그런 방식으로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진리의 말씀』(딤후 2:15) 전체, 곧 “성경 그 자체”를 모두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바른 성경,” 곧 “올바르게 번역된 성경의 가치”는, 구원받은 성도가 바르게 번역된 성경을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읽기만” 해도 성령 하나님을 통해 언제든지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 해석한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려 하기 전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이미 그 의미를 성경 안에 해석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경 안에 이미 주어진 진리나 해석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기록하시고 감추어 두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캐내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는 것은, 어떤 특정 진리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이 “어떤 책,” “몇 장,” “몇 절”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또한 그 구절이 다른 연관된 구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즉 그 구절이 그 연관된 구절과 어떻게 비슷하고(“유사”), 어떻게 똑같은지(“반복”), 그리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대조”) 아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이 바로 “성경 공부”이다. 그렇게 볼 때 성경을 부지런히 많이 읽은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성경을 잘 알고, 잘 깨닫고 싶은가?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라! 진리를 위한 투자는 결코 손해 보지 않는 투자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을 빛나게 해 주고, 우리의 현 생애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는 소위 “어려운 책들”이라 불릴 만한 “네 권의 책”이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사람들이 “믿지 못해서” 그렇지,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만 있다면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들”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심으로써 성취될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성경의 예언은 “미리 기록된 역사”이다! “예언을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그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둘째, 그 예언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 일어날 미래 역사까지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그 예언들의 의미까지 해석해 주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보다는 오히려 다른 “세 권의 책,” 곧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 책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잘 해결되지 않는 여러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상의 “어려운 책들”은 “과도기적인(전환기적인) 책들”로 분류된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정말로 깨닫기 어려워서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 및 신학교들에서 목사들과 교수들, 신학자들, 주석가들이 그들의 무지와 믿음 없음으로 쓸데없이 쉽게 걸려 넘어지고, 잘못 해석하여, 수많은 오류들을 양산해 낸 결과, 혼란스러우리만치 “어려운 책들”이 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나누어 놓으신 원칙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하기만 한다면 그 책들은 정말로 “쉬운 책들”이 된다.
이렇게 “과도기적인 책들”을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에, 이런 책들에 나오는 말씀들과 주요 교리들은 소위 단단한 “고기”(meat)로 분류된다. 성경의 기초 원리들처럼 “젖”(milk)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고기를 제대로 씹어서 소화할 능력이 없다. 『그 때로 보면 너희가 마땅히 선생들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니, 젖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단단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되지 못하는도다』(히 5:12).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 교수들과 주석가들이 이런 말씀들을 만날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맨다. 이 마지막 배교한 교회 시대에는 이와 같은 “고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여 소화 불량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기초를 떠나 온전함을 향해』(히 6:1)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진리의 지식에 관한 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딤후 3:9). 이 모든 “혼란의 핵심 원인”은 “성경 공부의 제1원리”(딤후 2:15)를 따르지 않은 것에 있다.
이 책은, “과도기적인 책들”로 분류되는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 썼다. 필자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하고 진리를 풍성하게 깨닫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만약 이런 방식의 성경 공부가 익숙지 않은 독자들이 있다면, 먼저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봄으로써 “경직된 마음”부터 풀도록 하자.
첫째, 성경에서 고기처럼 “단단한 음식”을 잘 섭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젖”(“우유,” 벧전 2:2), “꿀”(시 19:10; 119:103, 잠 16:24), “사과”(잠 25:11), “빵”(신 8:3, 마 4:4, 눅 4:4), “물”(엡 5:26), “고기”(고전 3:2, 히 5:12-14) 등으로 비유되는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젖”에 해당하는 말씀들만 섭취해서는 안 된다. “고기”에 해당하는 말씀들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고기처럼 단단한 음식을 섭취함으로 영적인 감각들을 단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히 5:14). 이 책은 독자들의 영적인 감각들을 단련시켜 줌으로써 선악을 온전히 분별하는 사람들로 성장하게 해 줄 것이다.
둘째, 고기에 해당하는 “단단한 음식들,” 곧 소위 “과도기적인 책들”(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로 분류되는 말씀들을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필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그 방법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우고 나면 “진리의 성경”을 보다 더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은 깨닫는 자에게는 모두 알기 쉬운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옳은 것이니라』(잠 8:9). 『조롱하는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나, 깨닫는 자에게는 지식이 쉬우니라』(잠 14:6).
이렇게 깨닫게 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딤전 2:4)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오직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벧후 3:18)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를 보호하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 4:6).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사역 위에 풍성하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2024년 4월 12일
성경침례교회 창립 32주년에 즈음하여
자, 여기에 어떤 사람이 “내가 오늘 구원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행 16:30) 이 질문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리이까?』(마 19:16)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이 사람에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 16:31)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오늘날 교회 시대에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십시오.”라고 하겠는가?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당시는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구약 시대”였기 때문이다! 시대가 서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속죄를 이루시기 이전에는 여전히 율법 시대이므로 “계명(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어야 했고,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폐기되었기에(엡 2:15)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21페이지에서)
“율법에서 은혜로” 전환되는 마태복음
1. 유대인 중심에서 교회 중심으로 전환되는 책
“십자가 사건 이전,” 곧 마태복음 27장 이전까지는 신약이 시작되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마태복음 1장부터 27장까지는 “율법적이고 유대인 중심적인 교리”가 등장한다.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태어나는 새로운 세대, 곧 “교회”를 위한 경륜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한 씨[a seed]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a generation]로 여겨지리라.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a people]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시 22:30,31). 여기서 말씀하는 『한 씨』와 『한 세대』와 『한 백성』이 “누구”인지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a chosen generation]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a royal priesthood], 거룩한 민족[an holy nation]이요, 독특한 백성[a peculiar people]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벧전 2:9).
아직은 이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도, 특히 “십자가 이전의 상황”에서는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사역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할례의 일꾼』(롬 15:8)으로 불리신다. 이에 반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롬 15:16)으로 불린다. 이런 이유로 마태복음에는 “이방인”도, “교회”도 아닌, 오직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이 곳곳에 등장한다. “몇 가지 사례”만 들면 다음과 같다.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마 1:21).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실 분”이란 뜻인데, 여기서 “자기 백성”은 “교회,” 곧 “신약의 성도들”이 아니다. 아직은 “신약의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구약적인 상황”이기에 “자기 백성”은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목적은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지금 이것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왕국 복음”을 그들에게 위임하시는 상황인데, 왕국 복음을 전파할 때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곧 “유대인들”에게만 가라고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경륜이 전환되는 사도행전
성경에서 이단들이 자기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책들 중 하나가 “사도행전”이다.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벌 떼”처럼 사도행전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그들이 이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도행전이 어떤 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특징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데, 무지가 맹목적인 사랑을 낳은 것이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적인(전환기적인) 책”이다. 이런 책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 하나가 아닌 두 개 이상의 시대 및 경륜을 다룬다. 둘째, 둘 이상의 경륜들 각각에 속하는 서로 다른 “대상들”(이를테면 “유대인”과 “교회”)과 그 각각의 대상들에게만 적용되는 서로 다른 “교리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즉 서로 다른 교리들이 상호 중첩되는 “교차로”가 존재하는 것이다. 셋째, 신약 안에 있지만 “구약적인” 책들이다. 그래서 신약적인 교리들로 일관하지 않고 교회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구약적인 교리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고 무딘 감각에 비뚤어진 마음으로 무턱대고 사도행전으로 덤벼들면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지난 2천여 년의 교회사에서 “교리적인 오류들” 대부분은 이런 과도기적인 책들을 억지로 풀었거나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이 책들이 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계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대적하려고 여러 차례 논쟁을 걸어 왔다. 그중에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논쟁을 건 주제는 “부활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려고 구약 성경을 어설프게 인용했는데(신 25: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마 22:29).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들은 성경을 인용해 가면서 아는 체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다. 성경을 나누어 볼 줄 모르면(딤후 2:15) 성경을 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단단한 음식인 고기와 같은 말씀들을 먹을 줄도 모르고(히 5:13,14), 또 성경을 억지로 푸는 자들은(벧후 3:16) 성경을 안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런 자들의 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지금 당장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과도기적인 책들을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짓 교사들을 끌어내리시기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11:19에서는 『이단들도 있어야만... 인정받는 사람들』, 곧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제대로 믿고 아는 것에 관한 한, 누가 “옥석”인지 가늠하게 해 주는 “시금석”이 바로 “과도기적인 책들”인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안에 기생하려는 간교한 이단들로는 소위 신유와 방언을 내세우는 “오순절 은사주의자들,” 침례(또는 세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로마카톨릭”과 “그리스도의 교회,”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 등이 있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특정 구절들을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제멋대로 끄집어내어 거짓 교리들을 정당화하고, 또한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거짓 교리의 틀 안에 성경 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며, 심지어 그에 부합하도록 아예 성경을 변개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