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91168614703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5-06-05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도시탐험가의 고향 이야기
1부 나의 살던 강남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신다면
서울 토박이, 강남 토박이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시내버스
도곡동에 없는 도곡초등학교
말죽거리의 중학교에 모인 도시 아이들과 농촌 아이들
그 시절 아파트 집들이의 필수 코스
어머니는 왜 아파트 화단에 김칫독을 묻었나
그 많던 피아노 학원은 왜 사라졌을까
담배 이름이 아파트 이름이 된 사연
2부 당신이 몰랐던 강남 이야기
경기도민, 하루아침에 서울특별시민이 되다
강남의 탄생
원조 강남 영등포
잠실은 한강의 섬이었다
강남을 가르는 경계선들
강남에 남은 전통 마을의 흔적
교통의 요지 말죽거리
‘흐능날’을 아시나요
강남의 국민학생들은 왜 등교를 거부했나
내몰린 자들의 터전이었던 강남
서울의 낙도, 강남
한강의 교량 이전에 나루터가 있었다
강남의 서울시립 공동묘지
3부 강남에 이런 일이
한밤의 소도둑 추격전
강남의 토막집과 토막민
기러기집과 야학의 아이들
어쩌면 최초의 고독사
어느 넝마주이의 죽음
보호수 실종 사건과 독극물 테러 사건
갈빗집과 가든의 상관관계
강남 유흥가의 시작은?
재개봉관의 추억
강남에는 왜 대형교회가 많을까
강남 랜드마크의 변화
개나리아파트와 영동아파트는 사라졌지만
나가는 글: 인생의 변곡점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 일은 식사 후 벌어졌다. 차례대로 화장실에 들어간 이모와 사촌들은 한결같이 눈이 동그라진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온수 꼭지를 돌리자마자 더운물이 나왔으니 말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놀라운 장관이었다. 한국 가정집에서 더운물은 거저 구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가족도 수유리나 서교동에 살 때는 머리를 감거나 혹은 한겨울에나 더운물을 쓸 수 있었다. 그것도 큰 솥에다 데워서. 그래도 서교동 집은 부엌에 수돗물이 나왔으니 멀리 옮겨야 하는 수고는 없었다.
하지만 장위동에 사는 이모네는 사정이 좀 달랐다. 1979년 6월 한 신문에 장위동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부터 상수도 설치가 되어 있지 않다고 표현할 정도로 장위동은 생활 기반 시설이 열악했다. 장위동뿐 아니라 1970년대 후반 서울에는 펌프로 지하수를 퍼 올려야 하는 집이 많았다. 이모네 마당에도 작두펌프가 있었다.
더운물을 쓴다는 건, 마당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부엌으로 옮긴 다음 아궁이 위 솥에다 붓고 끓인 후 찬물과 섞어 쓴다는 걸 의미했다. 이렇듯 더운물은 누군가의 노고가 들어간 노동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온수 꼭지를 돌리자마자 더운물이 콸콸 쏟아지다니. 이모네에게는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날 이모네 가족은 우리 집에서 목욕을 했다. 샤워가 아니라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몸을 담근 다음 때를 불린 후 이태리타월로 온몸 구석구석 미는 그런 목욕. 욕조에 모두 함께 들어갈 수 없어서 1차로 첫째와 둘째 사촌이 먼저 목욕한 후 2차로 이모와 막내 사촌이 목욕했다.
_「그 시절 아파트 집들이의 필수 코스」
그런데 강남은 원래 한강 남쪽을 의미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 되었다. 강남은 국가 권력이 개입된 도시개발과 교육환경 덕분에 특별한 지역이 되었다. 이들 지역에 상대적 부유층 혹은 특권층이 거주하게 되면서 경제 규모 상승에 따른 투자와 정책적 배려도 집중되었다. 다른 지역과 격차를 크게 벌리게 된 이유다.
그래서일까. 보통명사인 강남은 언제부터인가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다. 한강의 남쪽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보다는 고액 부동산이나 좋은 교육환경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 고유명사 ‘강남’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유명사 강남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후발 신도시들이 닮고 싶어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제2의 강남’ 같은 슬로건을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쉬이 볼 수 있다.
_「강남의 탄생」
그즈음 5학년이 된 나는 개포동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동아파트에 사는 어느 6학년 형이 예전에 자기네 가족이 살던 동네 근처에 폐쇄된 공동묘지가 있고 아직도 구덩이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 동네가 개포동이었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형과 나 그리고 몇몇 아이가 공동묘지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역삼동에서 개포동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걸어가기로 했다. 지금의 한티역과 도곡역 사이의 고갯길을 넘어가니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벌판이 보였다. 도곡동이었다. 오늘날 타워팰리스가 있는 바로 그 자리. 거기에서 개포동으로 가려면 양재천까지 간 다음 다리를 건너야 했다. 농경지 사이 진흙 길을 한참 걸어 양재천까지 갔다.
하지만 길을 잘못 택했는지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쳤던 우리는 탐험 의지를 꺾고는 되돌아왔다. 개포동에 있었다던 공동묘지는 그렇게 기억 서랍 속 깊은 어딘가에 묻혀버렸다. 긴 시간이 흘러 난 강남의 옛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어른이 되었다.
_「강남의 서울 시립 공동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