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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야기/사진가
· ISBN : 9791170370758
· 쪽수 : 184쪽
· 출판일 : 2026-03-10
책 소개
충분히 바라보는 일에 관해서
우리는 무심코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저울로 잰다. 그렇게 아파할 만한 고통인가, 저렇게 소리칠 만큼의 슬픔인가. 일정한 무게에 미달한다면 그럴 자격이 없다는 듯이…. 계체량을 통과한 고통과 슬픔은 이제 또 다른 심사를 기다린다. 이 고통의 원인은 납득할 만한가, 그 슬픔의 이유는 수긍할 만한가. 상식적인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함께 아파하거나 슬퍼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듯이….
이번 호의 특집으로 다루는 ‘자해’와 ‘자살’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도 나쁜 버릇처럼 계속 저울질하고 이치를 따진다. 얼마나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지녔기에 스스로 자신을 해칠까.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이러한 의문 속에는 이미 죽음보다는 삶의 의미가 더 중요하고, 자기 파괴보다는 자기 보호가 더 합당하다는 전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삶보다는 죽음의 의미가 더 무겁고, 자기 보호보다는 자기 파괴가 더 이치에 맞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어떤 선택이 더 옳은지 저울질하고, 이치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자해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호 특집 ‘자해 그리고 자살’에서는 모호한 관념이나 피상적인 숫자가 아닌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자해와 자살을 주제로 다루면서 어떤 이가 지나온 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 작업을 소개한다. 그리고 정혜윤, 남궁인, 이예지, 임민경, 김신식 등의 필자가 쓴 에세이를 통해 ‘자해와 자살’이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선과 태도를 함께 고민해 본다.
이러한 사진과 글을 천천히 바라보고 읽으면, 우리가 막연하게 품었던 자해와 자살에 관련된 생각과 표상이 얼마나 납작하고 무지한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그것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래야만 자신만의 기준을 내세워 섣불리 저울질하거나 함부로 이치를 따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과연 그렇게 미리 판단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까?’ 이번 호를 만들면서 독자들에게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다. 충분히 바라보기 전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 일이야말로 카메라와 사진이 지닌 가장 큰 역량일지도 모르기에.
목차
특집 | 자해 그리고 자살
001 Care in Progress _ Sarah Navan
012 At Least Until The World Stops Going Round _ Charlie Tallott
030 Now is Not the Right Time _ Peter Pflügler
044 Uma Azeitona Bordada em Azul _ Rui Costa
056 After _ Martin Kollar
070 The Unforgetting _ Peter Watkins
084 How is life? _ Hannes Jung
098 Las flores mueren dos veces _ Cristóbal Ascencio
112 The Suicide Boom _ Kenji Chiga
127 생일날 손목을 긋는 그에게 _ 박지수
145 보여지는 고통 _ 임민경
150 상처 입었으나 빛나는 별 _ 정혜윤
155 나는 자살한 사람을 봤다 _ 남궁인
160 낭만적인 자살은 없다 _ 이예지
165 자해상 _ 김신식
170 [연재 _ 영화의 장소들] 정치적인 것의 장소 _ 유운성
177 [연재 _ 일시 정지] 사진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_ 서동진
184 [에디터스 레터] 콜론의 의미를 필터 삼아 _ 박지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제가 두 살 때,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숲속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20년 넘게 그의 자살 시도에 관해서 침묵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끌리기 시작했고, 기일이 돌아오면 알 수 없는 슬픔의 물결이 저를 감싸기도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마침내 제게 말하기로 결심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 피터 플뤼글러, 작가 노트 중에서.
다시 사진 속의 앙상한 팔을 바라본다. 여전히 새빨간 피가 흐른다. 아무리 바라봐도 결코 생일날 스스로 자신의 팔을 칼로 긋는 이유를 들을 수는 없다. 당연히 그 사진은 그들이 왜 자해하는지 말해줄 수 없고, 다만 자해하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이다. 이제야 나는 뉴스와 신문에서 접했던 추상적이고 집합적인 개념의 ‘자해하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생일을 자축하며 칼을 손에 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가 존재하고, 그가 자해를 하고, 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보게 된다.
- 박지수, <생일날 손목을 긋는 그에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