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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한국정치사정/정치사-일반
· ISBN : 9791175484368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25-12-01
책 소개
목차
발간사 책을 펴내며 윤인구 | 제헌국회의원유족회 회장
축사 제헌국회와 헌법정신 이재명 | 대통령
기억에서 기록으로, 가족이 전하는 제헌국회의원의 발자취 우원식 | 국회의장
논고 제헌국회의원, 제헌국회를 다시 생각하며 서희경 | 서울대학교
회고록
01 제헌국회의원 강선명
청렴한 큰 어른 강명구 | 증손자
02 제헌국회의원 김경도
교육 백년대계의 초석을 다진 교육자 김성림 | 손녀
03 제헌국회의원 김광준
빛 광(光) 자 준걸 준(俊) 자 김관호 | 아들
04 제헌국회의원 김교중
잊어서는 안 될 전쟁의 기억 김정훈 | 증손자
05 제헌국회의원 김덕렬
75년 만에 쓰는 망부가(望父歌) 김현주 | 딸
06 제헌국회의원 김영기
대한민국 정통성의 상징-제헌국회의원의 실체 모습 김진현 | 아들
07 제헌국회의원 김옥주
김옥주, 젊고 유능한 초대 국회의원 김진원 | 아들
08 제헌국회의원 김용재
제헌국회의원 초부 김용재의 약사(略史) 김현문 | 아들
09 제헌국회의원 김웅권
파주 3.1만세운동과 조선민족청년단의 지도자, 김웅권 김형인 | 아들
10 제헌국회의원 김진구
백곡 김진구, 선의를 베풀고 대의를 이루다 김남석 | 손자
11 제헌국회의원 김태수
진해 할아버지 김태수 김동욱 | 손자
12 제헌국회의원 류래한
명함에 대한 소고 - 검소함과 청렴함에 대하여 류승현 | 증손자
13 제헌국회의원 류준상
제헌국회의원 소정 류준상 유민호 | 손자
14 제헌국회의원 문시환
나라 없는 설움처럼 뼈아픈 서러움이 없다 박영인 | 외손녀
15 제헌국회의원 박기운
명암(明岩) 박기운(朴己云) 선생의 생애와 정치 박준휘 | 손녀
16 제헌국회의원 박상영
외조부 계당(桂堂) 박상영(朴湘泳) 제헌국회의원을 추모하며 태준호 | 외손자
17 제헌국회의원 박종남
제헌국회의원 박종남(朴鍾南)을 추억하다 박경수 | 아들
18 제헌국회의원 박찬현
항상 등대가 되어 주신 나의 아버지 박순용 | 아들
19 제헌국회의원 백형남
젊음을 조국에게 백운선 | 아들
20 제헌국회의원 송봉해
나눔과 섬김의 봉사 정신으로 몸 바쳐 살아온 정암(靜庵) 송봉해(宋鳳海)
송민철 | 종증손
21 제헌국회의원 신광균
추위에 떠는 걸인에게 외투를 친히 벗어 주시고 오신 아버지 신현제 | 아들
22 제헌국회의원 신익희
해공(海公) 그리고 나의 아버지 신정완 | 딸, 신동호 | 종고손
23 제헌국회의원 신현모
나라와 말글에 바친 삶 신동립 | 손자
24 제헌국회의원 양병직
제주 대한청년단의 지도자, 청운(晴雲) 양병직(梁秉直) 양제갑 | 손자
25 제헌국회의원 오용국
제주를 대표한 제헌국회의원 오용국(吳龍國),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오창생 | 아들
26 제헌국회의원 원장길
그분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와 같았습니다 최윤상 | 외손자
27 제헌국회의원 유성갑
청운의 별이 지다, 석계(石溪) 유성갑(柳聖甲) 故 유대진 | 아들, 유빈·유담 | 손자
28 제헌국회의원 유홍렬
잊혔던 이름, 다시 꺼낸 기억 유유미 | 손녀
29 제헌국회의원 윤석구
기억 너머 할아버지, 故 윤석구(尹錫龜) 윤건 | 손자
30 제헌국회의원 윤치영
그리운 할아버지 윤인구 | 손자
31 제헌국회의원 이병국
국권 회복에 몸 바친 40년 이정구 | 손자
32 제헌국회의원 이상돈
설날의 추억 이영아 | 장손녀
33 제헌국회의원 이성우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다 이연행 | 둘째 아들
34 제헌국회의원 이승만
우남 이승만, 아내 프란체스카를 위해 목조 양변기를 만들다 이병구 | 손자
35 제헌국회의원 이인
어느 한 해의 회고 이정 | 아들
36 제헌국회의원 이재형
운경 이재형,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심인물 이해림 | 손자
37 제헌국회의원 이주형
조부 시곡공(時谷公)을 추모하며 이희일 | 손자
38 제헌국회의원 이진수
자랑스러운 나의 외증조부, 이진수 할아버지 최지연 | 외증손녀
39 제헌국회의원 전진한
할아버지 우촌(牛村) 전진한(錢鎭漢) 선생을 다시 만나다 전동현 | 손녀
40 제헌국회의원 정현모
은(銀)주전자에 담긴 그리움 한동현 | 외고손자
41 제헌국회의원 조국현
강철 같은 지조를 지킨 할아버지 조봉근│손자
42 제헌국회의원 조영규
관해(觀海) 조영규(曺泳珪) 제헌·3·4·5대 4선 국회의원 조상경│딸
43 제헌국회의원 지청천
지청천 장군의 아픔과 고뇌 지상철│손자
44 제헌국회의원 최범술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제헌국회의원 최화정│아들
부록
제헌국회의원 명단
제헌국회 사진 자료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연혁(1994년~2025년)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임원 명단(창립~5대)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창립과 초창기 일화들 김진현 |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창립 회장
제헌국회역사기념관, 제헌회관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듬해인 1949년에 아주 좋았던 기억으로는 중앙청 견학이 있었다. 삼청동에 있던 고종사촌들이 졸라서 이루어진 이벤트였는데 손을 잡고 중앙청을 향해 쫄랑거리며 가다가 아버님이 홀연 다른 곳으로 이끄셨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웅장한 그곳에서 어떤 어른을 만났는데 아버님은 “인사드려라. 이승만 대통령이시다.”라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다. 그곳은 바로 경무대였던 것이다.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도 계셨다. 당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전부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호주에서 왔다고 붙여진 명칭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 무언가 잘못 알려진 사실이 그대로 통용되었구나 싶었다. 경무대를 나올 때 호주댁은 나에게 인형을 선물하면서 “잘 가요, 아가.”라고 또렷한 한국어로 작별 인사를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람들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어를 전혀 못 하고 오만하다는 말들이 있어서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날 본 프란체스카 여사는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정다감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한테 인형도 선물했으니까
--- 「제헌국회의원 김덕렬: 75년 만에 쓰는 망부가(望父歌)(딸 김현주)」 중에서
그때만 하더라도 국회의원은 물론 상임위원장들조차 차를 한 대씩 못 갖고 재정위원장 홍성하와 아버님이 한 차로 동반하여 출퇴근을 했어요. 두 집이 신당동(약수동) 근처였습니다. 위원장이 아닌 국회의원과 국회 직원의 출근은 불하받은 미군 트럭이 맡았어요. 트럭 난간의 가운데를 따면 펼쳐지는 의자가 되는데 그 트럭이 말하자면 국회의원 통근 차량이었어요. 통근 ‘버스’가 없었지요. 이 트럭이 국회로 가면서 중간중간 신당동 네거리, 을지로6가, 3가 네거리 부근에 한 번씩 서는 거예요. 그럼 거기 모여서 타는 거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 전차 타고 다니거나. 비서도 없었고 보좌관도 없었어요. 월급은 중앙청 공무원 사무관급의 돈이었고 그 외 수당도 없었어요. 어느 날 국회 트럭을 얻어 타고 국회에서 내려 양정학교로 걸어가는데 연병호 의원이 흰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역시 하얀 고무신을 신고 전차에서 내려 국회로 걸어가셨던 모습이 왜 그런지 어제 본 것같이 선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요새 젊은 세대뿐 아니라 50대도 생각을 하기 힘들 텐데, 그때는 국회의원 집이라는 것이 여관이고 정거장이에요. 그냥 아무나 집 문 두드리면서 “나 안성군 공도면 아무개입니다.” 하면 문을 열어 줘야 해요. 집에 들어와 아버님이 밤늦게 오실 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또 자고. 그다음 날 아침에 아버지하고 나가면 다행인데 “내가 서울에서 며칠 더 일이 있어서.” 그러고는 나갔다가 그날 저녁에 다시 또 돌아오고 하면서 며칠이고 있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방이 내 방일 수가 없고 손님이 많으면 내 방에 모시고 난 안방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이 그 당시의 제헌국회의원 집의 살림 풍경이었습니다.
손님 접대를 하느라 씀씀이는 큰데 아버님이 생활비는 충분히 못 대 주시니 어머님이 참 어려우셨지요. 나중에 어머님이 마당에다 닭도 손수 치시고.
--- 「제헌국회의원 김영기: 대한민국 정통성의 상징-제헌국회의원의 실체 모습(아들 김진현)」 중에서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지금도 막걸리를 마시면 자연스레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들의 막걸리 심부름은 흔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쯤 할머니는 낡은 놋 주전자를 들고 동네의 유일한 점방(구멍가게)으로 가서 막걸리를 받아 오셨다. 그러면 나는 “제가 갔다 올게요.”라고 말하고 막걸리 심부름을 자처하고는 했다. 당시 점방에서는 막걸리를 큰 단지에 넣어 두고 주전자를 들고 오면 바가지로 퍼 주는 방식으로 막걸리를 팔았다. 사실 내가 막걸리 심부름을 자처했던 이유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이길래 그렇게 찾으시나.’ 하는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올 때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는 홀짝홀짝 맛보기도 했던 기억이 엊그제같이 생생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 「제헌국회의원 김태수: 진해 할아버지 김태수(손자 김동욱)」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