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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명상/선
· ISBN : 9791185062242
· 쪽수 : 318쪽
· 출판일 : 2017-07-18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 6
제 1 장 스와루파 스판다 I · 13
1. 본성(本性)의 스판다
2. 눈을 뜨고 감는 것
제 2 장 스와루파 스판다 II · 51
1. <동일(同一)한 경험자(經驗者)>
2. 그것이 <궁극의 실재(實在)>다
제 3 장 스와루파 스판다 III · 101
1. 막대기를 휘두를 수 없다
2. 마음의 동요(動搖)가 사라질 때
3. “내가 아주 <멍한 상태>에 있었군,”
제 4 장 스와루파 스판다 IV · 153
1. <행위자 혹은 주체>는 불멸이다
2. 그들을 끌어내는 것은 어렵다
3. “무엇을 말하든 나는 행하리라.”
제 5 장 사하자 비됴다야 · 203
1. 사하자 비디아의 출현(出現)
2. <쉬바가 아닌 상태>는 없다
3.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되고
제 6 장 비부티 스판다 I · 233
1. 스판다로 얻는 힘(力)
2. 그 굶주림을 이긴다
3.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
제 7 장 비부티 스판다 II · 267
1. <말로부터 일어나는 힘>
2. 말의 연상(聯想)이 없다면
3. 진정한 향유자(享有者)
나가며 · 311
저자소개
책속에서
들어가며
바수굽타의 저작으로 알려진 『스판다 카리카』는 『쉬바 수트라』에 <일종의 주석(註釋)>을 제공하는 문서다.
<신성(神性)의 의식(意識)>은 차갑고, 활기 없는 <지적(知的)인 작용>만은 아니다. 그것은 스판다다. 즉 <살아 있고, 역동적이고, 삶과 더불어 고동치는, 창조적인> 박동(搏動)이다.
쉬바 수트라에서 강조된 것은 신성의 프라카샤 측면이다. 스판다 카리카에서는 신성의 비마르샤 측면이다. 이 두 가지의 통합적인 시각이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정수(精髓)다.
[필자는 수행경(修行經) 쉬바 수트라에서, 나름 이 비마르샤 측면을 많이 강조했다.]
스판다는 문자적으로 “진동(振動)”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성 즉 의식(意識)의 역동성(力動性), 곧 <신성(神性)의 창조적 박동(搏動)>을 의미한다.
카리카라는 말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주제에 관한 구절(句節)의 모음”을 말한다.
스판다 카리카에 따르면, “참나”는 단순히 <지켜보는 의식>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식성(認識性)>과 함께 <활동성(活動性)>의 특성이 있다. 이 <활동적 자아(自我)와 함께하는 자(者)>만이 <자신의 가장 높은 상태>에까지 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뇌(右腦)에 관한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판타 카리카의 옛 주석서로는 아래의 것들이 있다고 한다.
(1) 『스판다 브릿티』 : 칼라타
(2) 『스판다 비브릿티』 : 라마칸타
(3) 『스판다 프라디피카』 : 밧타 웃팔라
(4) 『스판다 산도하』 : 크세마라자
(5) 『스판다 니르야나』 : 크세마라자
『스판다 산도하』는 <스판다 카리카 1장 1절>의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주석서로는 다음이 있다.
『Spanda Karikas』 : Jaideva Singh 2012년
스판다가 무엇인가?
스판다는 이 전통에서 쓰는 아주 전문적인 용어다. 그것은 일종의 <움직임>으로, 운동(運動), 진동, 고동(鼓動), 박동이다.
그러나 신성(神性)에 적용될 때, 그것은 움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비나바굽타는 그것을 아주 명확히 한다.
“스판다는 어떤 종류의 움직임을 말한다. 만약 신성의 핵심으로부터 다른 대상 쪽으로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명확한 움직임일 것이지만, 그것은 <움직임 그 자체>가 무(無)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판다는 신성(神性)의 핵심적인 본성에서 <모든 연속성(連續性)을 배제하는>, <영적인 기쁨의 [상하] 요동(搖動)이고, 박동>이다.
이것이 ‘킨칫 칼라남’에서 그 ‘킨칫’이라는 말의 중요성이다.”
킨칫 칼라남은 <(이를테면)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미묘(微妙)한 움직임>이라고 하자.]
잘 알다시피, 움직임 혹은 운동(運動)은 <시공간(時空間)의 구조> 안에서만 일어난다. 그러나 <지고(至高)의 그 무엇>은 시간과 공간 너머의 것이다.
그러므로 스판다는 <물리적인 운동>도 아니고, 고통과 기쁨 같은 <심리적인 동요(動搖)>도 아니고, 배고픔과 갈증 같은 <생체 에너지의 활동(活動)>도 아니다.
그것은 <신성의 나-의식[비마르샤]>의 황홀경의 고동이다. <신성의 나-의식>은 영적인 역동성이다. 그것은 <신성의 창조적 박동(搏動)>이다. 그것은 쉬바의 스와탄트리야 즉 <절대 자유>다.
만약 스판다가 어떤 종류의 움직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말을 <지고(至高)의 활동>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스판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비나바굽타가 설명한 것이다.
“스판다나는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의>라고 하는 특징은 <부동(不動)의 것>일지라도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意識)의 빛>조차도 ?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변하지 않더라도 - 변(變)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동(不動)도 마치 여러 가지의 현현(顯現)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스판다는 <그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는 영적(靈的)인 역동성(力動性)>이다. 그렇지만 모든 운동의 필수조건으로 있다.
무한하고 완전한 <신성의 나-의식(意識)>은 항상 비마르샤 즉 <자아 자각(自覺)[“참 나를 느끼는”, 자신을 알아채는 일]>을 갖는다.
<자신을 알아채는 일>은 영적인 역동성인 <미묘(微妙)한 활동>이다. 그것은 물리적, 심리적, 생체 에너지의 활동이 아니다.
웃팔라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신성은 항존(恒存)하고, 불변하는 <참나 자각[즉 비마르샤]> 때문에 <위대한 주[마헤슈와라]>라고 한다.
그 절대적 자유 안에서, <자신을 알아채는 일>은 신성의 <지식[재인식(再認識)]과 활동>을 이룬다.”
스판다는 <“참 나를 느끼는”, 나를 알아채는 일> 혹은 비마르샤의 다른 이름이다.
크세마라자는, 스판다는 스와탄트리야[<신성의 절대 자유>]를 포함한다고 한다.
비마르샤, 파라 샥티, 스와탄트리야, 흐리다야, 아이슈와라, 카르트리트바, 스푸랏타, 사라는 모두 [기독교의 “성령”을 포함하여] 스판다의 동의어다.
스판다 샥티……
그녀는 ? 항상 <만트라의 생명력[즉 나-의식]>을 의식하고, (모든 문자가 그 핵심인) <나-의식>으로 번쩍이고, <갸나[지식]의 몸을 가진 여신>으로 ? 늘 <프리트비에서 쉬바까지>의 전체성을 안다.
그것들은 본질에서 그녀 자신과 <하나>이지만, 마치 <거울에 비친 도시처럼>[그 도시는 그 거울과 다르지 않다.] 그녀 자신의 자유롭고 깨끗한 자아의 캔버스 위에 그녀 자신의 본성을 표현한 것이다.
온 세상에 편만한 영광(榮光)을 기뻐하는 쉬바의, 그 쉬바의 스판다 샥티 즉 <신성(神性)의 창조적 에너지>에 경의(敬意)를!
이 세상에서, <참나의 엄청난 위대함>이 쉬바의 영감(靈感)으로 바수굽타에게 나타났다. 그[쉬바]는 그의 은혜(恩惠)를 모든 사람에게 베풀려고 했다. 바수굽타는 <꿈에 지시를 받아> 마하데바 산에서 <가장 비의적(秘意的)인> 쉬바 수트라를 얻었다. 그것은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바수굽타는 <계시(啓示)-경험(經驗)-논증(論證)의 부합(符合)>을 드러내는 것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수트라의 의미>를 <51개 절(節)로 모아[카리카]>, <깊은 의미>와 <명료한 형태>로 표현했다.
처음 25절은 <쉬바의 핵심적 본성>인 스판다를, 다음 7절은 <사하자 비디아의 출현(出現)>에 관한 스판다를, 마지막 19절은 <굉장한 힘(力)>을 얻는 스판다를 기술하여, 이 스판다 카리카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3장으로 된 스판다 카리카를 이 책에서는 [책 편집의 편의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다룬다.
제 1 장 : 1장 < 1 > 절
제 2 장 : 1장 < 2 > - < 5 > 절
제 3 장 : 1장 < 6 > - < 13 > 절
제 4 장 : 1장 < 14 > - < 25 > 절
제 5 장 : 2장 < 1 > - < 7 > 절
제 6 장 : 3장 < 1 > - < 10 > 절
제 7 장 : 3장 < 11 > - < 19 >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