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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신라/통일신라
· ISBN : 9791185614113
· 쪽수 : 560쪽
· 출판일 : 2025-06-20
책 소개
이번 책은 “그렇다면 그 ‘이사지왕’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안을 찾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2025년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그 주인공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자학・음운학・금석학・어원학 등 언어학적 접근을 통하여 저자는 신라 제19대 국왕인 눌지(訥祗) 마립간이야말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정답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금관총 유물과 그 인근의 신라 고분들에 대한 고고학・역사학・고고미술사적 비교・분석은 ‘이사지=눌지’라는 결론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같은 결론은 마립간 시기의 신라사는 물론이고 신라・백제의 교섭사를 재조명하는 데에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사지=눌지’ 및 ‘금관총=눌지왕릉’를 전제로 삼을 경우 경주 노서・노동・황남동의 신라 고분들은 물론이고 공주 송산동의 백제 고분들도 그 주인공과 연대 역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는 금년 10월 세계인의 큰 잔치인 APEC 대회가 성대하게 거행될 예정이다. 이번 책은 신라가 이미 4세기 무렵부터 북방사, 나아가 세계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나라였으며, 그 신라를 품은 한국 역시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나라였는가를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 더 없이 좋은 홍보자료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주요 내용 소개
01) 경주 노서・노동동 봉황대 주변의 동산들이 신라시대 왕릉들이라는 결론을 최초로 내린 것은 일본인들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였다. (제1장)
02) 일본인들은 금관총의 발견과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의 명성을 ‘대일본제국’ 고고학의 위상과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일종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제1장)
03) 1920년대에 신라 고분 발굴을 주도한 것은 하마다・우메하라・고이즈미 등 쿄토 파였으며, 그 정점에 하마다가 버티고 있었다. (제1장)
04) 신라 고분에서 점토는 외부의 충격・침식으로부터 봉분을 단단히 잡아 주는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적석총 ⇒ 점토층 ⇒ 토사층 ⇒ 점토층’ 식으로 봉분을 올린 것이 그 증거이다. 1,600년 전의 이 선진적인 건축 공법은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렵다. (제2장)
05) ‘1관 1곽’의 신라 고분에서는 곽에서 관을 비대칭적으로 배치한다거나 머리맡에 부장공간을 두기도 하며 제사와 제물의 흔적도 자주 관찰된다. [흥미롭게도 이같은 양상은 흉노 고분들에서도 자주 관찰된다.] (제2장)
06) 최근 경주의 동궁・월성 터에서 순장된 개의 뼈가 수습되었다. 건물을 지을 때 일종의 수호자・경비원 삼아 순장했으리라. 흥미롭게도 흉노(훈)나 로마에서도 비슷한 흔적들이 확인된다. 비슷한 습속을 공유하는 신라-흉노-로마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제2장)
07) 신라어 ‘-간’은 그 의미・발음에서 튀르키예어 ‘카안(Kağan)’, 몽골어 ‘한(хан)’, 페르시아어 ‘칸(khan)’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4~6세기 마립간 시기의 신라어가 ‘알타이어족’의 한 갈래였음을 시사해 주는 언어적 증거이다. [놀라운 것은 ‘탈해 17년(93)’에 처음 등장하는 ‘간’이 ‘중국 정사에 처음 등장하는 등장하는 가한’보다 400년이나 빠르다는 사실이다.] (제3장)
08) 6세기 포항 냉수리비의 “차칠왕등”은 ‘갈문왕 등 일곱 분’이라는 뜻이다. 왕호를 가진 갈문왕을 대표자로 내세우면서 나머지 신라 귀족 6명을 아울러 일컬은 표현인 것이다. 이는 신라에서 귀족은 ‘-왕’으로 일컬어진 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제3장)
09) ‘이사지’에서 ‘사’는 뜻글자도 사이시옷도 아닌 속격 조사로 사용되었다. [‘이’와 ‘지’라는 2개의 개별적인 단어가 ‘사’를 문법 표지(속격 조사)로 삼아 소유관계로 연결된 합성명사인 셈이다. 따라서‘尒斯智’는 ‘이사지’가 아니라 ‘이ㅅ지’, 즉 ‘이지’ 식으로 읽혀야 옳다.] 복합명사에서 명사A와 명사B의 종속관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지(mark)로 사용되었을 뿐 그 의미나 음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사지는 ‘너사지’나 ‘닛디’가 아닌‘니디’로 새겨야 옳다. 그 금석-문헌적 증거가‘내지’와 ‘내지’이다. (제3장)
10) ‘이사지’에 사용된 ‘–지’는 신라어가 언어적으로 튀르키예어(‘–지/치’, ‘즈/츠’)나 몽골어(‘–치’) 등의 알타이어족과 계통이 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다른 언어적 증거이다. (제3장)
11) 4~6세기 200년 사이에 재위한 신라 왕으로는 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이 있었다. 이 6명 중에서 음운상으로 초성(자음)과 중성(모음)이 이사지 즉 ‘니디’와 완벽하게 대응되는 인물은 ‘눌지’뿐이다. [눌지야말로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금관총의 주인공 ‘이사지왕’인 것이다.] (제3장)
12) 신라 사회에 뒤늦게 편입되어 세력이 약했던 김씨 집단은 처음에는 박・석 씨족과도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 정치・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지면서 점차 근친혼을 지향하게 된다. 이 독특한 습속은 김씨가 왕권 경쟁에서 독주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4장)
13) 《일본서기》는 일제의 조선 식민화를 정당화 하는 데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을 다룬 “신공 5년” 기사는 더더욱 그렇다. 간지를 맞추어 볼 때 이 기사는 연-월-일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과 연대를 무시한 조작된 기사가 《일본서기》에 넘쳐난다는 뜻이다.] (제4장)
14) ‘백제왕이 와국 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일본서기》 기사는 근거없는 주장이다. 지금 전해지는 칠지도 유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제작시기를 나타내는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라는 명문이다. [실제의 간지를 따져 보면 그 날은 병오일이 아니라 임신일이기 때문이다.] (제4장)
15) ‘임나일본부’는 ‘임나에 설치된 일본의 대표부’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일본 영사관 또는 조선시대의 왜관처럼, 일본이 백제・임나・안라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을 관할할 목적으로 현지에 설치한 기관일 뿐이었다는 뜻이다. [백제나 가야를 공격하거나 지배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4장)
16) 신라 금관에서 곡옥은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금령총과 쪽샘 44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에 곡옥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은 그 주인공이 자녀를 보지도 못한 채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5장)
17) 신라 금관은 ‘출(出)’자형 가지와 구부러진 사슴뿔이 조화된 복합형 왕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뿔을 닮은 장식은 봉곳한 꽃봉오리가 맺힌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신라 금관은 곧은 줄기와 구부러진 가지가 조화된 100% ‘수목형’ 왕관인 것이다.] (제5장)
18) 신라 금관은 무덤에 넣어 주는 장례 용품의 일종이었다. 종잇장처럼 1mm 두께의 얇은 금판이 그 증거이다. 만약 그런 허술한 금관을 쓰고 몸을 움직이면 세움 장식은 격렬한 운동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을 것이다. (제5장)
19) 관 테가 있는 신라 금관은 구조적으로 선비계 관모 장식과 구별된다. 선비계 관모 장식은 그 구조나 제작기법은 말할 것도 없고 심미관・세계관에서도 신라・틸리아 테페・사르마트의 금관과는 계통이 다르며, 예술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치하다. [신라 금관이 3~4세기 모용선비의 영향을 받았다는 잘못된 주장은 중국영향설을 처음 제기한 하마다에게서 비릇되었다.] (제5장)
20) 신라 귀걸이에서 귀에 거는 고리의 굵기는 사용자의 신분이나 취향의 차이를 나타낼 뿐 성별을 구분하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남성성이 강조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금관총이 그 증거이다. (제5장)
21) 고구려・백제・중국에서는 반지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라의 반지 문화는 유독 이채를 띤다. [금관총만 해도 3가지 유형의 반지가 16점, 금・은제 팔찌가 29점이나 출토되었다.] 이 점은 신라에서 반지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배층의 위세품으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제5장)
22) 공주 송산동 4호분에서는 금관총과 동일한 양식의 은제 띠 장식판과 스페이드 문양의 칼집 씌우개가 출토되었다. 금관총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금관총=눌지왕릉’이라면 이 고분은 웅진 천도 전후의 개로왕 또는 문주왕의 왕릉이었을 것이다. (제5장)
23) 금관총을 중심으로 조성된 노서・노동동 고분군은 나물계 마립간들의 가족묘지였을 것이다. 금관총 맞은 편의 봉황대는 그 아버지 나물 이사금, 봉황대 남쪽의 금령총은 그의 요절한 형, 금관이 나오지 않은 식리총은 그의 당숙・장인이자 정적이었던 실성, 금관총 옆의 서봉총은 그의 동생 미사흔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는 ‘금관총=눌지왕릉’이라는 전제하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제6장)
목차
발간사 5
서 문 8
제1장 금관총은 어떻게 발굴되었나
제1절 최초로 신라 왕릉의 존재를 인식한 김정희 26
제2절 금관총 유물은 어떻게 수습되었나 34
제3절 금관총 유물에 열광하는 일본인 학자들 38
제4절 ‘경주왕’으로 불린 골동품 브로커 50
제2장 금관총의 원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1절 금관총의 봉분 62
제2절 금관총 등 신라 고분에서 점토의 용도 65
제3절 새로 확인된 목조 가설물의 존재 73
제4절 금관총은 정말 중형 고분이었을까 81
제5절 ‘1관 1곽’의 묘장 배치 93
제6절 제사 의식의 흔적들 102
제3장 금관총의 주인공 ‘이사지왕’은 누구인가
제1절 ‘이사지’에 대한 학자들의 언어적 접근들 114
제2절 ‘이(尒)’는 신라시대에 어떻게 발음되었나 128
제3절 ‘이사지’의 ‘사’는 어떻게 사용되었나 141
제4절 신라어에서 ‘지’는 어떤 성분인가 159
제5절 ‘차칠왕등’과 이사부의 문제 179
제6절 ‘이사지’의 종합적인 음운 분석 189
제4장 눌지 마립간은 어떤 인물이었나
제1절 눌지의 내력 210
제2절 석씨 집단의 사람 실성 221
제3절 동생들을 구해 올 인물을 물색하다 240
제4절 박제상의 순국 258
제5절 눌지 마립간의 업적들 268
제6절 눌지 마립간의 대외관계 282
제7절 《일본서기》 기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293
제5장 금관총 위세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제1절 금관 315
제2절 관모 338
제3절 환두대도 354
제4절 귀걸이 379
제5절 반지 396
제6절 팔찌 412
제7절 허리띠 428
제8절 금동 신발 454
제6장 그러면 금관총 주변 고분들은 누구의 무덤인가
제1절 봉황대 – 봉황이 깃든 왕릉 481
제2절 금령총 – 요절한 신라 왕자의 무덤 495
제3절 식리총 – 실성의 무덤인가 502
제4절 서봉총 – 봉황 장식 금관이 나온 무덤 511
제5절 에필로그 – 노동-노서동 고분군은 나물계 마립간의 가족묘지일까 538
참고문헌 545
찾아보기 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