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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6459102
· 쪽수 : 113쪽
· 출판일 : 2015-08-25
책 소개
목차
-김성은-
나는,
칸나
또, 칸나
칸나, 그리고
그늘의 빛에 대하여
적막孤寂한 안부
첫눈 내리는 날
접시꽃
접시꽃, 그리고
산
칠월의 기억
그 남자의 여자
“아프리카 세렝게티는 얼마 남지 않은 야생동물들의 천국입니다.”*
별
하루 중의 어떤 시간
등교 풍경
압해도押海島
길
11월은,
조화造花
국밥집
여름 그림
나는 시詩가 되었다
부석사浮石寺
만하晩夏
먹먹한 식욕
연鳶
사랑은
묘비墓碑 앞에서
그해 가을
-나의숙-
풍경 1
풍경 2
풍경 3
꽃무늬 빤스
첫사랑
그 여름 속으로
거울공주
바다에게
전봇대
5월의 느티나무
복숭나무
애완견 행복이
나의 주인은
틀니
문자왔어요
장모치마
첫 눈 내리던 날
아침오늘
침대
냉이가 이사를 갑니다
석곡*
배추
젖소
하루
군자란
너의 문 앞에서
2월, 어머니
봄, 그리고
오늘의 특선요리
나의 유년
손톱
자전거 타고 가는 수녀님
-박화숙-
오월의 등 뒤에서
비 개인 오후
친정나들이
달력
동백꽃
흑백사진
바위
사월의 끝머리에서
목백일홍紫微
낙서
여자
어느 날 오후
해질녘에 서서
다락방 전축
군자란
바닷가에서
잠금쇠
낙화
저녁거리
징검다리
어미
가지치기
먼 사랑
구월에
열쇠를 보며
건배
흔들리는 날엔
울 엄마
그날처럼
그대 부르면,
책속에서
<시인의 말>
여름의 광채가 맹렬한 이 계절에,
우리는 더 맹렬히 닦아온 작품들을 한권의 시집으로 엮어냅니다.
<뜨락>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세 권의 사화집을 내었지만, 그것도 어느새 십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끝까지 시를 놓을 수 없었던 우리 세 사람은, 그동안에도 서로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가며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이 여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스스럼없이 제 중심을 내어보이듯, 우리의 삶과 생각과 직관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갈 것입니다. 3人 3色, 서로의 색은 달라도 시의 빛줄기를 향한 걸음은 한결같습니다.
경계를 풀지 않는 눈빛을 언제나 지켜갈 것입니다.
<김성은>
나는 한 마리 벌레였다.
모질게 떼 내어 버려져야 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오랜 시간을
썩은 냄새로 방치되었다
겨울 들판 살아남은 초식동물이었다
빛이 들면 납작이 웅크리고
어둠이 내리면 언제나
문을 잠가 나를 가두어야 했다
나는 잘못된 목적이었다.
온 만큼 꼭 되돌아가야 하는
돌아가서는 탈, 탈, 털어버리면 그 뿐일
착오이고 실수였다
영원히 말해지지 않을
금기禁忌였다
문은 더욱 두터워져만 가고,
감금監禁은 기억될 수 없었다.
나는,
비밀이었다.
-나는,-
매미 울음은
칼날처럼 번뜩였다
가늘은 목에서
짙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의 목을 내리친 것은
매미 울음이었다
굴욕을 이겨낸
자존, 그 장렬한 절정
인고의 계절 동안
순교殉敎는 계속되었다
-칸나-
대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푸른 어깨 꼿꼿하고
의연한 기상 변함없다
환란患亂은 길고 참혹했다
밤낮없이 숨통을 조이면서도
엎드릴 한 뼘 공간마저 내어주지 않던 계절을
순교로 지켜내고
폭한暴漢 모두 물러간
시월 한참 지난 오늘도 여전히
자존으로 도열해 있다
잘린 목 치세우고
붉은 피 끊임없이 솟아내며
-또, 칸나 -
<나의숙>
공습경보처럼 후두두 빗줄기가 떨어진다. 거리의 사람들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재빠르게 몸을 피하느라 빗줄기보다 더 무서운 발소리를 낸다. 후. 두. 두. 후두두, 후두두…… 굵은 빗줄기는 공평하게 주택가에도 쏟아진다. 주택가는 지붕 대신 마음껏 하늘을 담을 수 있는 옥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옥상에는 문패처럼 노랗고 파란 물통을 붙박이로 들여 놓았다. 빨랫줄에 걸터앉아 있던 옷들이 비 맞은 개처럼 후줄근한 여름 한낮.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병처럼 만나게 되는 삶의 국지성 폭우를 슬기롭게 넘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풍경 1-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식당가 골목. 불황에도 용케 10년을 버티고 있는 칼국숫집과 보쌈집. 팔십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두 할머니가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깊숙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어린 시절 가난처럼 지독한 무더위다. 목까지 타고 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인사를 건넨다. 덥지유. 이래 더운 여름은 머리털 나고 처음인 거 같소, 나 혼자 몸 같으매 이래 안 살아도 되것지만 자슥들한테 쪼매라도 힘이 될랑가 싶어 이러고 있소. 밀가루 반죽처럼 차지고 돼지고기처럼 진하게 우러나는 노모의 마음. 어느새 식당가의 불이 한 집 두 집 켜지면 덩달아 발바닥에도 불이 켜진다.
-풍경 2-
밤이 깊어도 경계심을 풀지 않는 불빛들. 여자들은 더는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남자들.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 술에 취한 그녀가 전봇대 옆에서 오줌을 누고 아스팔트 위에서 깨어난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놀이터까지 들어와 그네에 앉는다. 기다림의 무게는 시소처럼 기울어져 있다. 웃음보다 한숨이 더 길었던 하루가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사업 실패로 가장이 되어 버린 여자들, 몸통을 받쳐 주던 척추뼈가 굽어 간다. 등과 맞닿은 갈비뼈가 자꾸만 삐걱거린다. 조그맣게 새어 나오는 쉰 목소리, 아파트 불빛들조차 기다림을 잃어간다.
-풍경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