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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6644997
· 쪽수 : 314쪽
· 출판일 : 2019-11-20
책 소개
목차
복순 씨의 개종改宗
젊은 날의 우화羽化
딱따구리의 죽음
가락지
우물
홍수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제사를 물리고 고수레까지 문 앞에 내놓은 다음 복순 씨는 불 꺼진 홀에 앉아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았다. 공연히 슬픔이 밀려왔다. 돈을 벌면 뭐 하는가, 글을 몰라 아들에게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무식쟁이일 뿐인데-어쩔 수 없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원망과 후회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눈물의 기원이 외로움 때문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외로웠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가게의 여주인이었지만 진정으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말벗 정도의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아들은 어쩌면 자신이 여기에서 여생을 보내기를, 아들과 살기보다는 그저 고향에서 가까운 여기에서 남은 생을 꾸려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들의 처지와 경제적인 상태를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외로움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벼가 익어가는 풍경이 풍요로울수록,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그녀는 논으로부터,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던 길 건너편의 교회는 오히려 그녀의 일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이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종소리는 그녀가 어떤 시간인지를 알게 했고, 거기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새와 걸음걸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드나드는 학생들의 모습이 판박이 같은 고정된 삶 속에 그나마 살아있는 활력을 주었던 것이다.(「복순 씨의 개종改宗」)
나는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한 것처럼 끊임없이 미영의 얼굴을 상상하고 그 상상에 여러 가지 상황을 배치함으로써 애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얘기하고 커피를 마시는가 하면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나의 현실 곳곳에 자리를 잡은 미영의 환영은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점점 그것이야말로 애정이라고 생각했으며 한순간도 비현실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미영이 애정의 대상으로 바뀐 것은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선글라스의 여인을 미영과 동일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일상은 짝사랑하는 자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미영의 전화번호를 다시 찾아 입력하고 회계법인의 위치와 우연히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또 기다렸다. 안경을 벗은 온전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일상을 지배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내게 두려운 존재였다. 나에게 집착하는 매력적이지 못한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단지 바뀐 것은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서 가장 자신 없어 하던 부분을 성형했다는 사실뿐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젊은 날의 우화羽化」)
폭격을 맞은 듯 아이들이 사라져버리자 나는 그 전쟁터 한가운데에 지뢰를 밟아 움직일 수 없게 된 듯 딱따구리와 함께 남겨지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으로부터 달아날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내가 딱따구리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기를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이 새는 애초에 내가 잡은 것이 아니니 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급히 손으로 발밑의 땅을 파고 딱따구리 사체를 묻고는 흙을 싹 덮어버렸다.(「딱따구리의 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