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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7494294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25-07-07
책 소개
목차
9
어둡고 밝은 방
29
일요일을 떠나다
51
밤의 태양절
71
달의 언덕을 넘어갔읍니다
97
내가 없는 곳에서 너는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함경북도 온탄의 1994년 초가을 아침, 열린 부엌문으로 밖의 찬 공기가 밀려들자 빛인지 바람인지 모를 순간의 칼날이 계집아이의 맨살의 종아리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원형의 기억을 새기며 스치고 지나간다. 꽃씨 같은 소름이 돋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이 나라를 45년 간 통치했던 우두머리가 지난여름에 사망한 이래로 망자를 위한 곡이 계속되고 있다.
젊은 어미가 밥상을 들고 들어와 방바닥에 내려놓자 사내아이들이 앞 다투어 상 앞에 앉는다.
기다리라. 아버지 아직 안 오지 않았니? 이렇게 버릇없어 어따 쓰갔니?
밥상 위엔 묽은 통 강냉이 죽이 담긴 사발 네 개와 작은 간장종지가 하나 놓여 있다. 밥상을 둘러보는 젊은 어미의 광대뼈가 빛난다. 젊은 아비가 계집아이를 안고 들어와 말없이 내려놓는다. 젊은 어미는 계집아이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온다. 젊은 아비와 사내아이들과 어미의 무릎 위에 앉은 계집아이가 상 앞에 마주 앉아 죽을 먹는다. 젊은 어미는 계집아이의 엉치뼈를 느끼고만 있다.
지난여름 이래로 사람이 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죽이 사람의 목구멍을 삼키고 있지만, 이 끝없는 허기에 대해 가족은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다만 평화롭고 배고픈 아침 풍경이다.
-「어둡고 밝은 방」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엄마의 눈앞에 흐르고 있는 강물은 교실 안의 정적처럼 고요하고 잔잔할 것이다. 원래 수심이 얕은 강물은 불어나 봤자 가슴께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지금쯤 엄마는 믿음직한 안내자와 함께 강가에 서서 해가 기울길 기다리고 있겠지. 이윽고 하늘에 차가운 빛이 어리면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서서히 물에 잠기어갈 것이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은 부력이 되어 그들의 발걸음을 도울 것이고, 어쩌면 엄마는 종종 그렇듯 강의 한가운데서 문득 멈추어 설지도 모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에 잠길 때의 엄마의 얼굴은 영림이와 닮아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린다.
저녁이 가라앉는 강의 정적 속에서 엄마가 조용히 멈추어 선 채 우리들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일요일을 떠나다」중에서
“그래, 어쨌든. 나는 꿈을 꾸는 내내 그 호랑이의 안색을 살피면서 저게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물 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었어. 한 순간엔 안심했다가 한 순간에 두려워하고를 반복했던 것 같아. 그런데 결국 그 놈은 끝까지 이빨을 드러내지 않더군. 그런데 말이지, 한편으로 나는 그 놈이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를 물어도 좋으니 말이야.”
그의 말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그림자가 검은 암벽에 어룽졌다. 성태가 내리깐 눈으로 자신의 빈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간 자넨 좀 이상해.”
순철이 입을 열었다.
“용꿈이면 용꿈, 개꿈이면 개꿈인기지 그게 다 무시기 소리야? 하여간 머리에 글이 든 사람들은 뭐가 좀 복잡해.”
순철이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잡아먹혔으면 좋겠다고…….” 그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성태가 잎담배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탄맥은 니미럴.”
-「밤의 태양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