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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8841301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23-09-25
목차
1부 살며
나는 누구일까…13
여자다움과 나다움에 대하여…18
나는 울트라마니아…22
먼저 베푸는 선의, 그리고 참어른…28
소중한 친구를 보내며…32
물건의 건강한 쓰임을 위하여…40
언니라고 불리는 사람들…45
살아온 날들의 못자국…51
나의 손…57
주부에 대하여…62
순결한 사귐, 조화와 균형의 관계…66
기다려지는 계절…72
신을 믿는다는 것…76
2부 기르며
육아 하며 육아하기…85
전환의 의미…91
아이를 키우는 최소 인원은…97
안전한 어른, 성숙한 어른…101
행복의 샘물…106
사과의 의미…111
오해와 이해 그 사이에서…118
첫 심부름…123
한해를 보내며…128
오늘의 인사…133
고양이의 매력을 즐긴다는 것…138
어차피…143
3부 사랑하며
어머니와 콩나물…153
바보스러운 사람, 엄마…157
불구부정…163
깨끗한 거짓말…167
평화를 빕니다…173
나의 남편…179
즐거운 나의 집…185
4부 여행기
인도 여행기…193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누구일까
초등학교 3학년쯤 어느 주말이었다. 집에서 하릴없이 놀고 있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열한 살 위의 큰언니는 버스를 태우고 나를 어린이 도서관에 데리고 갔다. 그렇게 두어 번은 같이 가주던 언니가 이제 너도 열 살이니 버스를 혼자 타보라고 하였다. 내 자신 없는 표정에 자신 없을 게 없다며 언니는 작은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주었다. 오고 가는 버스 번호였다. 잘 모르겠거든 기사 아저씨나 주위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며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처음에 조금 헤매긴 했지만 우려와 달리 별 어려움은 없었다. 언니의 말대로 버스 안에는 도움을 요청할 어른들이 늘 있었고 대부분 그 즉시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다.
그렇게 가끔 심심한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게 되었는데, 문제의 그날엔 가는 길이 꽤 편해졌는지 흔들리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너른 논밭의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무슨 상황인지 헤아리느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두 정거장이 지난 뒤에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시골 어르신들뿐 도서관 위치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50대 정도의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셔서 ○○도서관에 가려 하는데 지나친 건 아닌지, 지나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여쭤보았다. 그러나 전혀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만 갸우뚱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하셨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떤 어르신이 기사 아저씨께 상황을 물으셨고 아저씨는 짜증과 황당함을 가득 안은 얼굴로 그게 언제 적 지나친 곳인지 아냐며 빨리 내리라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나는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잠에서 깬 건 한참 됐는데도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아주 기분 나쁜 꿈이었다. 버스에는 사람이라도 몇 명 있었는데 내려선 정류장에는 숫제 아무도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은 내 이름과 집 전화번호뿐인데 그 흔한 공중전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전화를 걸 동전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열 살의 다 큰 애는 논밭을 바라보며 엄마! 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고아가 되는 건가. 고아원이란 곳을 생각하니 책에서 읽었던 고약한 생활상이 아득히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내 머릿속에 떠올려진 것은 어느 책에서 봤는지도 가물가물한 한 장의 삽화였다. 어두운 방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벌레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큰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주 몹쓸 곳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지 않았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졸지 않았다면, 아까 그 구박하던 기사 아저씨한테 욕지거리를 더 듣더라도 돌아갈 방법을 자세히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고는, 나의 모자람에 너무도 서러워져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논밭만 펼쳐지는 논두렁에서, 들을 엄마가 없다는 걸 알면서 엄마만 부르며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어떤 언니가 황급히 다가왔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나에게 누구인지, 엄마는 어디 계신지,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건지 등을 물어보았다. 나는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언니는 빙긋이 웃고는, 내 손을 꼭 잡고 걱정하지 말라며 집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다독였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무섭고 기분 나쁜 꿈은 단박에 물러났다. 내 옆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은 오직 딱 한 명이었지만, 그 한 명만으로 출렁이던 세상이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그렇게 들썩이는 울음을 진정해 가며 막연하지만 또 그만큼 또렷하게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나 자신도 제대로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는 누구냐’는 낯선 사람의 질문에 나는 나를 잘 설명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어떤 이미지일 뿐 제삼자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부족했다. 나는 청주시 사창동에 살지만 사창동에 사는 열 살 여자아이는 너무도 많았다. 우리 부모님 이름은 이러이러하고 나는 5남매 중 막내딸이지만 이런 정보는 일반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즐겨보는 만화, 나와 친한 친구들의 이름들은 길을 잃은 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철저히 아무도 아니었다.
언니는 고맙게도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에 함께 올라 행선지가 나와 같은 어르신에게 내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부탁까지 하고 중간 정류장에서 내렸다. 혹시 모른다며 여분의 버스비까지 내 손에 쥐어 준 채였다. 익숙한 풍경으로 진입하는 버스 안에서 조금 전까지 휘몰아치던 급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었고, 언니들은 엄마를 도우며 저희끼리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는지 깔깔대고 있었다. 할머니도 몸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며 TV에 열중하고 계셨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평온하여 몇 시간 전의 일이 정말이지 꿈만 같게 느껴졌다. 가족들에게 오늘의 일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러게 왜 졸았냐는 타박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수선스럽지 않은 덤덤한 반응에 섭섭하기도 했지만 내가 평상시의 일상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음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몇 시간 전의 아무도 아닌 자에서 다시 ‘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이 나를 진영이로 부르는 이 평범한 일상과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나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을 그날의 느닷없는 경험으로 뼛속 깊숙이 체감했다.
지금 마흔이 넘은 나도 열 살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어쩌면 나는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관계 속 내 모습을 대타자가 되어 살피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 속에서 깊이 있는 자기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를 잘 아는 데에는 거미줄과 같은 관계 속 타자의 각기 다른 시선이 기어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다움과 나다움에 대하여
2, 30대 처녀 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는 여자답게 좀 꾸미고 다니라는 말이었다. 어떤 이는 안타깝게, 또 어떤 이는 한심하단 뉘앙스로 그 말을 전하곤 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충고이고 조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비난이고 조롱이기도 했다.
실상 나는 꾸미지 않는다. 색조 화장은 물론이고 기초화장도 정말 최소한의 것만을 추구한다. 옷이나 신발도 주어진 것을 충실히 활용할 뿐 신상을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거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관심이 없다. 사람은 관심이 없는 것에 게을러진다. 모든 영역에 관심을 두고 부지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라던 80~90년대는 성실이 최고의 가치였고 성실로 나라가 지탱되던 시대였다.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개미처럼 하고 싶지 않아도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리고 여자로서 꾸미고 가꾸는 것은 그러한 성실의 덕목 중 하나였다. 그 당시 나는 꾸미고 가꾸는 여자다움을 성실이란 덕목으로 여기는 것에 당연시했고 나다움의 선택지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주 많은 순간 내 게으름이 부끄러워 반성하고 노력하곤 했다. 하지만 관심사가 아니기에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결혼 전까지 반성, 노력, 지적, 그리고 다시 반성과 노력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그게 불필요하게 되는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왔다. 내가 아이 엄마가 된 것이다. 꾸미지 않아도 더 이상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세 가지 성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 남성, 그리고 애 엄마라는 전혀 웃기지 않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엄마가 되는 순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성으로서의 덕목이기도 했던 ‘꾸밈’은 사치가 된다. 나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꾸밀 줄 모르는 게으른 여성에서 검소하고 알뜰한 엄마로 평가받고 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속성이자 선택일 뿐 게으른 것도 찬양받을 일도 아님을 말이다. 솔직해지자면 나는 꾸미는 대신 조금 더 자는 걸 선택한다. 치장보다는 손수 먹거리를 해 먹고 청소를 하거나 책 한 줄 더 읽는 것에 내 성실을 더한다. 그러나 관심이 없을 뿐 꾸미는 것 자체를 싫어하진 않는다. 예쁘게 꾸민 사람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소박한 차림새만을 보고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게 나란 사람이었다. 반성하고 노력하여 고칠 것은 없어 보였다.
오늘도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을 보게 된다. 그녀가 거울 앞에 마주하며 기분 좋았을 순간이 상상된다. 아름다운 그 순간은 그녀만의 것이다.
그녀의 옆으로 민낯에 운동화를 구겨 신은 여성이 지나간다. 학교 쪽으로 빠르게 걷는 걸 보니 아이를 데리러 가는 듯하다. 아니면 편의점에 무언가 사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운동화를 고쳐 신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일 테다. 그녀는 급한 일을 선택했다. 다급한 그 순간도 그녀만의 것이다.
문득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내 모습이 나에게 괜찮고 초라하지 않다면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에 지나치든 부족하든 상관없는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이 지적한다 해도 그 사람의 생각이 그렇구나, 정도로 매듭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다움에서 나다움의 초입으로 오기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기대도 된다. 나를 제대로 알고 통합하여 바라보는 데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울트라마니아
대입 준비로 정신없던 2000년 8월, 서태지 컴백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가 초·중학교 때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 서태지가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난 알아요>와 <교실 이데아> 속 짤막한 가사 몇 줄,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 그리고 다음 음반 작업을 위해 휴식기를 갖기 시작한 최초의 가수라는 점 정도였다. 사실 딱히 큰 관심은 없었다. H.O.T나 젝스키스, G.O.D 등 1세대 아이돌이 대거 등장하던 때라 더욱 그러했다. 오히려 은퇴했으면서 왜 자꾸 나온대? 돈이라도 떨어졌나, 하는 얕은 짜증이 일 뿐이었다.
얼마 후 나는 리모컨을 돌리다 MBC에서 방영하는 〈서태지 컴백 스페셜 무대〉를 우연히 시청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동네 바보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서태지의 첫 등장 장면이다. 곡 <오렌지>의 전반 사운드가 베이스기타와 휘슬로 슬금슬금 시작되더니 드럼과 일렉기타들이 심장을 빵빵 차며, 빨간 머리의 서태지가 별안간 무대 아래에서 토스터 속 식빵처럼 튀어 올라왔다!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관객들의 비명과 환호성도 더해져 그 열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무대에 발을 디디며 그대로 파워풀하게 헤드뱅잉을 해댔다. 순간 세상이 정지하는 듯 숨이 탁 막혔다. 정말 강렬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그의 ‘울트라 마니아’가 되었다. 당시에는 왜 하필 수험생 때 나타나서 날 정신 못 차리게 하나,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 그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힘겨움을 그를 통해 해결하고 버텨나갈 수 있었다. 밤 11시까지 야자(자율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모르는 듯하다. 야간자율학습이 아니라 야간강제학습이 맞다.)를 끝내고 봉고차에 실려 집에 오면 11시 반이 넘었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하며 서태지의 앨범을 찾아보고 그의 일화를 눈에 담았다. 앨범별로 가사를 프린트해 테두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며 외우기도 했다. 지루한 수험생활은 활력을 찾았고 나도 그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다. 수능이 끝나고는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돈이 허락하는 한 콘서트 투어에 최대한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낯선 곳에서는 나무토막처럼 서 있게 되는 나였지만 콘서트장에서만큼은 생판 모르는 남의 어깨를 잡는 것이 세상 자연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나의 열정에 가족과 친구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나는 무난하고 둔하다. 한마디로 누구를 광적으로 좋아하기 힘든 성격이다. 그런 내가 왜 그토록 그에게 열광했을까? 나의 뇌는 컴백 무대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을 한 장의 사진처럼 각인하고 있다. 지금도 눈을 허공에 두고 그때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의 표정이다. 가수에게 빠진 이유가 음악이 아니라 표정이었다니. 좀 황당한 이야기이긴 하다. 물론 그의 음악은 내게 언제나 특별하다. 터져버릴 듯한 비트의 사운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냉소적인 음색으로 뱉어내는 특유의 가사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고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다시 말하지만 역시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나에게, 이제 고3이니 네 미래는 네가 선택하라는 말은 해방감보다는 당혹감을 주었다. 난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그냥 하루하루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인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밖으로 밀쳐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위해 살고 먹고 공부하는지 알 수 없는 암흑 같은 동굴에서 그의 등장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빛과 같았다. 그가 복귀 무대에서 품었던 두려움, 떨림, 비애, 기대, 환희 그 모든 살아있는 감정들이 말간 얼굴에 담겼다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게 음악만큼이나 많은 메시지를 건네는 듯했다. 너는 어떠니? 너도 나와 같지 않니? 묻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보았고, 그럼에도 이 혼란 속에서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투지도 느꼈다. 그런 마음이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도 절실히 다가왔던 거였다.
컴백 앨범인 6집 이후에도 나의 마니아적 행렬은 계속되었지만 열정의 크기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당시에는 식어버린 내 마음에 죄책감까지 느끼곤 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고 본다면 나의 마음이 변했다기보다는 그의 모습이 변화한 거라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내가 열광한 것은 서태지, 존재 그 자체는 아니었다. 냉정히 말하면 그는 나와 개인적인 관계도, 접점도 전혀 없는 유명인일 뿐이었다. 다만 그가 정리되지 않은 온갖 감정들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표현해내는 모습은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게 새로운 방식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내가 찾는 나의 모습을 그를 통해 발견하였기에 그는 대중의 스타가 아니라 ‘나만의 서태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나와 달리, 어느 순간 그는 안정되어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일체감이 아닌 스타와 팬 사이의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다. 그는 분명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의 주변으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종종 그의 컴백 무대를 유튜브에서 찾아보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두 손을 모은 열아홉 소녀가 되어 꿈틀꿈틀 흥분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의 사생활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강 알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좋지도 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 인생에서 나를 찾게 된 첫 실마리를 그가 함께 해주었다는 것이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화면 너머로 그는 내게 말한다.
넌 소유 속의 널 믿는가
네 자아보다 더 값진 건가
쉽게 뿌리 깊게 굳게 박힌 교만 허튼 욕망
…중략…
내겐 따뜻한 느낌이 없어 왜
꺼져버려 넌 참 비겁자인걸
다들 널 떠난 뒤 널 찾을래
나는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 자신에 대해 치열히 탐색하였던 그 노력이 삶에서 그를 잘 이끌어 줬을 거라는 믿음이다.
소유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길 거부하고 모든 걸 놓고 떠나기로 결심했던 스물다섯의 청년, 그럼에도 무대가 그리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스물아홉의 청년. 따뜻하고 싶었지만 혼란 속에 냉정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관조하는 그의 눈빛은 그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가 혼란했던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때 그를 진정 사랑했던 ‘마니아’로서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