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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91189171216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차례
1부
2부
3부
4부
5부
책속에서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자신의 진료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은 쥐 한 마리에 발부리를 부딪혔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짐승을 발로 밀어 두고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거리로 나와 생각해 보니 죽은 그 쥐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발길을 돌려 수위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미셸 영감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본 것이 실제로 생뚱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 놓인 죽은 쥐가 자신에게는 단지 이상한 일에 불과했으나 수위에게는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위의 입장은 단호해서 이 건물에는 쥐가 절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층 층계참에 쥐가 있었고 죽은 것 같다고 분명히 말해 줘도 영감은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건물에 쥐란 있을 수 없으니 필경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것이다. 요컨대 누가 장난을 친 것이라고.
그날 저녁, 베르나르 리외가 건물 복도에 서서 집에 들어가기 위해 열쇠를 찾고 있을 때, 그는 털이 젖은 큰 쥐 한 마리가 어스름한 복도 끝에서 나타나 비틀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쥐는 멈춰 서서 균형을 잡으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의사 쪽으로 달려오다가 또 멈추어서는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혼자 맴돌았다. 그러더니 결국엔 축 늘어진 입 사이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의사는 한동안 쥐를 바라보다가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쥐가 아니었다. 쥐가 토해 낸 피가 마음에 걸렸다. 일 년째 병석에 누워 있는 그의 아내는 산속에 있는 요양원으로 내일 떠날 예정이었다. 그가 권했던 대로 그녀는 침실에 누워 있었다. 여행의 피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아주 좋아요.”
의사는 머리맡 램프의 불빛 속에서 그를 향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외에게는, 서른 살의, 게다가 병색을 띤 얼굴이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항상 젊을 때의 그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바로 그 미소가 나머지 모든 것을 상쇄하기 때문이리라.
“가능하면 잠을 자도록 해요. 간호사가 열한 시에 올 테니 정오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내가 데려다주리다.”
그가 말했다.
그는 살짝 땀이 밴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방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이 기이한 사건들이 안겨다 준 놀라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각자는 자기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시로 들어오고 나가는 문들이 폐쇄되고 나자 그들은 모두, 서술자를 포함하여,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야 했다. 그래서 예컨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조차, 첫 몇 주간부터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되었으며, 공포와 함께 이 기나긴 유배의 시간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고통거리가 되었다.
문들을 폐쇄함으로써 초래된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온 급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어머니와 자식들, 부부들, 연인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잠시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라 믿었던 이들, 기차역에서 몇 마디 당부를 주고받으며 포옹하고 며칠이나 몇 주 후면 다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이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빠진, 짧은 이별로 인해 일상 속에서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조차 잠시 잊었던 이들이 느닷없이 서로 떨어져, 하소연할 곳도 없이, 다시 볼 수도, 소식을 전할 수도 없이 생이별을 겪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시의 폐쇄는 도청의 결정이 공표되기 몇 시간 전에 이루어졌고 당연히 개인적인 사정은 참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스트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말미암은 첫 폐해는 시민들이 마치 사사로운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는 것이다. 당국의 결정 사항이 실시된 후 첫 몇 시간 동안 도청은 전화를 하거나 직원들을 붙잡고 사정을 호소하는 민원인들로 들끓었다. 그들의 상황은 하나같이 절실했으나, 당장 조사해서 손을 쓸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인 즉, 우리 모두가 ‘타협이니 ‘부탁, 혹은 ‘예외라는 말들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그렇습니다. 반성해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에만 하느님을 찾아뵙고 나머지 시간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무릎 몇 번 꿇는 것으로 죄에 물든 무감각이 충분히 보상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미적지근한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드문드문 찾는 관계로는 하느님의 뜨겁게 넘쳐흐르는 사랑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사실은 그것만이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가 지친 하느님이, 유사 이래 죄로 물든 모든 도시에 그랬던 것처럼, 재앙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찾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카인과 그의 자식들과도 같이, 노아의 홍수가 닥치기 이전의 사람들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파라오와 욥 그리고 저주받은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되었듯이, 여러분은 이제야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가 여러분과 재앙을 벽으로 둘러싸 막아 버린 그날부터, 이 모든 자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존재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여러분은,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중앙홀로 밀려들어와 큰 촛대의 불꽃이 지글거리며 이리저리 휘어졌다. 짙은 촛농 냄새, 기침 소리, 그리고 재채기 소리가 파늘루 신부에게까지 들려왔다. 신부는 높이 평가받은 그 능란한 말솜씨를 발휘하며 다시 주제로 돌아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 중 대다수가 제가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실 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진리로 이끌고자 하며, 기뻐하는 법을 알려 드릴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충고나 동지애적인 손길이 여러분을 선으로 이끌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날 진리는 하나의 명령입니다. 구원으로 가는 길을 여러분에게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붉은 창이며 그것이 여러분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세상 만물에 선과 악, 분노와 동정, 페스트와 구원을 불어 넣은 하느님의 자비는 바로 여기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망에 빠지게 하는 페스트가 바로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