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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

그녀의 방

채길순 (지은이)
국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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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그녀의 방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805593
· 쪽수 : 86쪽
· 출판일 : 2025-11-20

책 소개

소설가 채길순 교수의 소설으로 잊혀져가는 지난 날의 아픔과 추억을 소환한다. 이제 희생양으로 죽어갔던 그 세대들이 정권을 잡은 현실에서 다시금 이 소설을 내놓음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세상사의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기억과 현실의 간극’이다.

목차

그녀의 방 7

난쟁이 마을 이야기 47

작가의 말 83

저자소개

채길순 (지은이)    정보 더보기
■ 저서 ☆ 장편소설 ■ 『흰옷이야기』①-③, (한국문원, 1998) ■ 『동트는 산맥』①-⑦, (신인간사, 2000) ■ 『조캡틴정전』(2011, 화남) ■ 『웃방데기』(2014,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 저자와의 소통 : ■ 홈페이지 : http://chea41.cafe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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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녀의 방

1

그녀의 분노는 자정을 넘은 시간에 카톡 문자로 폭발했다. 뭐랄까, 하루 종일 자루에 차곡차곡 고여온 분노가 이 시간까지 팽배한 끝에 터져버리듯, 한꺼번에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 왔다.
“내가 왜 네 놈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네 말은 수직 관계에서 나온 폭력이라고! 내가 니놈의 하인이야? 개XX!….”
나는 그때마다 잠시 넋이 달아나 멍히 앉아 있었다. 잠 세상으로 진입하려는 몽롱한 기운이 일시에 달아나고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이런 때 나는 최대한 답을 미뤘다. 그녀가 화내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 보거나, 잘못 보냈다는 사과의 문자가 뒤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답 문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답 문자를 입력하는 동안 오히려 은근히 화를 키우고 있었다.
“하인이라니! 말도 안 돼. 옛적 훼드라 주점 기억 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오히려 나의 선생이었잖아.”
40년 전, 한동안 사이가 좋았던 스무 살의 시절을 소환했다. 그때 우리는 잠깐 연인이었고, 나는 그녀처럼 투사가 되지 못한 채 배신자가 되었다. 내가 보통의 삶을 이어갈 때 그녀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아 나와 자연 멀어졌다. 요즘 어색한 중에 옛적의 사랑을 회복해 가는 중이어서 굳이 수평 수직의 사건이 벌어질 틈도 없었다. 어떻게든 욕설 문자는 맥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고, 결국 답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카톡 문자 창을 내리자, 그녀가 이어서 보낸 아프리카 세렝게티 별들이 넘실대는 밤의 정경과 동물 왕국 유튜브 영상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하이에나가 떼를 지어 한 마리 암사자의 성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영상을 전달하면서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아서 왜 이 영상을 보냈는지 알아맞혀 보라는 수수께끼 같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화가 치밀어 한가하게 수수께끼 따위를 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지방의 작은 도시 남녀공학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청소년 시절 친구 경계를 막 넘어 연인으로 들어선 만남은 같은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학교 부근에 있는 주점 훼드라에서였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몸이 움직이는 대로 성인 같은 애정 표현을 해도 자연스러울 때였다. 아니, 오히려 호기심으로 다 따라하고 싶을 때였다.
1981년 봄, 그해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세상은 ‘5.18 광주’에 질식해 있을 때였다. 적막한 중에 벚꽃이 성급하게 피었다가 무너지듯 져버렸다. 연둣빛 나뭇잎과 풀이 물감처럼 진하게 번져갈 무렵에 학생 시위가 시작되더니 점차 빈번해지고 격해져 갔다.
그녀와 나는 신입생으로 처음 대하는 데모여서 살짝 들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가 권해준 『체 게바라 평전』을 구해 하룻밤에 독파해 버렸다. 다음 날은 밑줄 쳐 가면서 꼼꼼하게 읽으며, 그녀와의 대화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더러더러 메모를 해나갔다. 말마다 화사한 혁명의 꽃이 피었고, 깃발이 나부꼈다. 나는 체 게바라(Che Guevara)가 암살령을 피해 동지이자 아내인 일다 가데와 함께 멕시코로 망명하는 장면에 단박에 꽂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망명길에 오르는 상상까지 했다. 혁명 동지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이 세상 어떤 가시밭길도 함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리는 눈부신 봄 햇살이 봄비 끝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벚꽃을 화사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 훼드라에 갈 때 나는 그녀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쿠바로 향하는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1959년 1월 1일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고,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쿠바 혁명이 완성되었듯, 그녀와 나는 어느새 환상 속에서 혁명을 완수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내가 주점 훼드라에 들어섰을 때 안에서 터져 나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떠밀려 주춤했다. 나는 주점 입구에서 이동식 동그란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창밖으로 이어진 광장에서 함성이 일면서 데모대와 전투경찰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그녀가 데모대를 가멸차게 주도하며, 눈앞에는 바야흐로 혁명의 폭풍전야였다. 이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 팔을 불끈 들어 운동가를 선창했고, 모두 일어나 팔을 뻗치며 합창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노래 끝에 구호가 이어졌다.
“파쇼 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살인 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이때 등 뒤에서 그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왔네.”
그녀의 얼굴은 밖에서 구호를 선창하다가 나타난 듯 상기되어 있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신념이 서린 그녀의 얼굴은 체 게바라의 연인 가데처럼 예뻤다.
“지금 우리의 투쟁이 계획대로 하나씩 진행되어 가고 있어.”
신입생인 그녀가 벌써 노련한 시위대 지도자처럼 보였다.
“전사가 다 된 것 같아!”
“광주 투쟁 경험 덕분에 정말 투사 대접이여. 내게는 과한 대접이지만, 투쟁으로 보답해야겠지.”
“대단해. 날더러 여기에 끼어들라는 것이여?”
“당연하지. 지금은 길거리에 구르는 나뭇잎 한 장도 무기로 들고 나서야 할 판에.”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
좀 전까지 체 게바라가 되었던 내가 그녀 앞에서는 벌건 대낮에 시든 야채가 되어버렸다.
“당장 행동에 나서면 그만이지 무슨 준비여.”
그녀의 가냘픈 몸에 예쁜 투사의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지난해, 5.18 시기에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나는 다락방에 숨어 있었고, 그녀는 광주의 한 복판에 있었으니까. 스산한 죽음들의 구덩이에서 살아 돌아온 그녀가 오열하면서 내게 말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앞길이 정해졌다.”
그녀는 나를 끌어들여서 우리라고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한번도 진지하지 못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를 빼앗길 것 같아서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 지명수배자가 돼서 짭새가 따라붙었어. 여기를 빠져나가야 혀.”
그녀가 갑자기 잔뜩 겁이 든 눈을 번뜩이며 나직이 말했다.
“곧 세상이 깜짝 놀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한동안 나를 못 보게 될지도 몰라.”
“못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여?”
“더 알려고 하지 마! 다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화장실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녀가 나를 화장실 안으로 끌어들이더니 나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얼떨결에 나도 그녀를 끌어안았고, 언제부터 내가 주도하여 그녀의 부드러운 혀와 입술을 지배했다. 뜨거운 기운에 들떠 그녀가 말했다.
“사랑해!”
“나도!”
나도 신음 속에서 틈이 날 때 짧고 다급해져서 말했다. 그런데 그 시절 그 나이에도 ‘사랑해’라고 했는지, 아니면 ‘좋아해’라고 했는지 기억에 뚜렷하지 않다. 어쨌거나 게릴라 성 소나기 같은 다급한 애정 행위 끝에 그녀가 머리와 옷매무새를 여미며 말했다.
“나, 간다. 잘 지내.”
“어디로 가는데?”
“혁명의 길이란 험난한 길이지. 길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나고, 그 끝에 새로운 길을 만나겠지. 나는 진작에 동지들과 이 길을 가기로 맹세했어.”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뒤쪽에 건물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나는 투사가 되어 펄럭이는 깃발의 땅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나도 그녀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 같았다.
주점이 낮술의 취기에 무르익어 노래와 구호가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집단 취기에 휩쓸려 나 자신 마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주점을 나왔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같은 수배자가 된 느낌이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몇 발 내딛었을 때였다. 내 옆으로 색안경 낀 두 사내가 따라붙었다. 형사구나. 달아나지 못하도록 바짝 달라붙었다. 인도를 넘어 도로는 데모대와 경찰이 밀썰물처럼 밀고 밀리는 중이었다. 내가 형사들을 떨쳐내는 방법은 저 데모대 안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이를 눈치챘는지 형사가 더 바짝 달라붙었다. 내가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려 나는 인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혀 얼굴이 깨지고 코피가 터졌다. 내가 며칠간 골방에서 키워왔던 전사의 꿈이 산산조각 나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취조실 백열등 아래 앉았다. 형사가 내가 독파하고 밑줄 그으며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을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로 내밀었다. 그녀의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곁에 준비한 채찍을 휘두르기도 전에 아는 것은 물론 추측까지 다 불어버렸다. 한 발 더 나가서 입대를 자원한 뒤에 잘 생각했다는 칭송까지 들으며 풀려났다. 형사의 칭송은 신념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나에 대한 조롱이었다.
난쟁이 마을 이야기


난쟁이 마을 이야기

새벽부터 장대비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푸른 새벽 기운이 걷히면서 빨랫줄에 걸린 누나의 빨간 원피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구천을 헤매던 혼이 빗속에서 환생하듯.
원피스는 누나가 집을 나가던 날부터 걸려 있었고, 그날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빨랫줄에 걸린 채 젖고 마르기를 거듭했다. 형과 나는 누나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의식처럼 원피스를 내버려두었다.
형이 밤새 굳게 닫혔던 방에서 나왔다. 수돗물에 컵라면 국물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난쟁이 마을 스피커가 윙윙대기 시작했다. 이 후진 난쟁이 마을에 저런 시설도 있었나? 형이 중얼거렸다. 오래 죽어있던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이 빗소리에 섞여서 말을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런 중에 ‘여자’ ‘연고자’라는 희미한 말 조각이 간신히 귀에 들어왔다.
“누나 아녀?”
어떤 예감에 내 입에서 신음 같은 말이 새어 흘러나왔다. 누나가 죽다니! 눈앞이 캄캄해졌고,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여자’라는 말이 누나임을 확신시켜 줬다. 늘 화를 꿰차고 사는 형이 버럭 성을 내어 말했다.
“빛의 속도네! 지금 인터넷 검색창에 ‘난쟁이 마을 여성 시신 사건’으로 난리다. 그래도 누나는 아니다! 절대로!”
형이 힘주어 말했다. 형과 나는 누나가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장대비를 뚫고 집을 나섰다. 빗속에서 마을 방송이 계속 윙윙댔다. 내가 형의 뒤를 따라 뛰면서 물었다.
“어디래?”
“난쟁이 마을과 양짓말 경계란다.”
앞에서 뛰어가며 형이 말했다. 난쟁이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랑물이 비가 안 오면 검은빛으로 악취를 풍겼지만, 오랜 장맛비에 다 쓸려 내려가고 흙탕물이 도도한 기세로 내달렸다. 발작하듯 빗방울이 굵어졌다.

난쟁이 마을과 양짓말의 경계에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세상은 경계가 없이 두루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에는 이런 경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역설이다. 현실에 양짓말 쪽에는 흰 얼굴이, 난쟁이 마을 쪽에는 검은 얼굴이 구별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는 키도 얼굴색도 같았지만 진화하지 못해서 음짓말이라는 원래 이름을 버리고 난쟁이 마을로 불렸다. 두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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