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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9898861
· 쪽수 : 133쪽
· 출판일 : 2022-12-01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5
제1부 그림자놀이
그림자놀이 13
월선리 14
문 15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16
옛날 사진 18
집 20
가족의 해체 22
함포 24
절명 26
낮술 28
나이 30
학천 31
음 양 32
새, 새가 난다 34
눈물의 유아기 36
제2부 푸른 독을 품는 시간
푸른 독을 품는 시간 41
ㅤㅃㅔㄴ찌 43
승강문을 열다 44
소통 46
생 47
후야 48
세차 49
죽음에 관한 보고 50
파업 52
귀족 54
왜 그랬는지 56
루시 58
향우사업소 김 여사 5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61
제3부 시인
시인 65
영동에서 66
고독사의 쓰임새 68
말들의 최후 70
8433호 71
성주 72
몽탄 가기 전에 74
공소 시효 75
안녕 77
망각 78
노안 80
성은당 82
신호등 84
테를지의 밤 85
제4부 나무는 나무
사랑을 잃었다면 89
무등을 바라보며 90
국밥 92
그날 이후 94
흰 꽃을 엿보다 96
피젖 97
폭설 98
시위 시위 100
미얀마로부터─봄 102
가거도 104
시칠리아의 암소 106
창불 108
전라도 여자 110
나무는 나무 111
ㅣ해설ㅣ 임동확 113
저자소개
책속에서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부족한 시간 보충하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지요
기름밥 땀나게 먹던 시절은
사실 푸른 독 데쳐 먹던 날들을 이어 붙인 것 같았지요
시간 밖에서 시간을 끼니처럼 때우던 푸른 시절은
우리밖에 부를 수 없는 흘러간 유행가 같아
늘어진 빨랫줄에 매달린 낡은 작업복 같아
곰곰이 되짚었어요 결함을 찾을 때까지
몇 번을 되짚어가다 꼬박 날 샜던 것처럼
어떤 겨울날은 시간 위에 시간을 껴입었어도
원인불명으로 기록되었지요
그런 날은 차라리 냉정하게 모든 원인을 짓이기고 싶었어요
시간 밖에서 공복을 달래는 술병이 적금
깨서 탕진한 눈물 같았어요
인과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흐르더군요
지금은 한 시절 철로 위를 걷던 동지들에게
손 내밀어야 해요
푸르게 눈 뜨던 시간 푸르게 빛나던 출발신호기와
푸른 작업복과 시간 밖 푸른 청춘에게
알맞게 데쳐져 입맛 다시던 푸른 독들에게
이제 안녕 작별의 손 내밀어야 해요
이제 안녕
<향우사업소 김 여사>
이것저것 안 해본 일 없지만 딱히 잘하는 일도 없어 못하는 일도 없어
손맛 좋다는 말에 백반집 차렸다가 털어먹고 입맛도 살맛도 잊어버려 세상살이 흐지부지할 때 딱 일 년만 해보라는 친구 말에 기차 쓸고 닦는 향우사업소 들어왔는데
한 일 년 해볼까 하다가 애들은 커가지
서방은 골골하지 밖에 나가봐야 거기서 거기
몇 년 더 버텨 옛날 식당 했던 손맛으로 작은
분식집이라도 차릴까 하다가 잘못하면 입맛도 세상 살맛도 영영 버릴 것 같고
애들 취직하면 그만둬야지 하다가
골골하던 서방 죽고 애들은 벌써 시집 장가들어 손자도 봤으니 쉬어야지 하다가
혼자 집에 들앉아 봤자 속만 허전할 것 같고
삭신도 예전만 못해 어깻죽지에 파스 떨어질 날 없어
올까지 하고 그만둬야지 하다가
늘그막에 밖에 나가면 누가 받아주나
손자들 용돈벌이라도 해야지
그러다 보니 이십 년
생전에 기차 청소할지 몰랐네
차 쓸고 닦는 일로 늙어버릴 줄 몰랐어
남 발자국 손자국만 닦을 줄 알았지
원수 같은 서방 밥숟가락이라도 들 때 손 한번
닦아줄 것인데
이왕 갈 것 깨끗하게 해서 보낼 것인데……
그래도 손자 하얀 손 쳐다보면 이뻐 죽것어
꺼칠한 내 손가락 잡고 꼼지락거리는 것 보면 이뻐 죽것어
<시칠리아의 암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고백했지만
끝내 건너가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눈감지 못한 아이들이
그대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 있는 거리
산 사람들의 도시를
요나의 눈으로
판관의 눈으로 보는구나
거리에 속 깊은 눈들이
지금 당신을 보고 말하는구나
맹골의 물길 거슬러 신발이 벗겨지고
손톱이 닳아빠지도록 싸웠던
무섭고 서러웠던 마지막 사투를
구명조끼 갑옷처럼 두르고
거짓과 음모와 배신 앞에서
움켜쥔 주먹으로 치 떨리던 입술로
증언하고 있구나
질곡의 사월 또 사월
뒤틀린 욕망 짊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에 갇힌 자들이
그대들의 이름 부르며 울부짖는
신음소리 가득한 휴일 한낮이여
우리는 평생 소처럼 울부짖으며
그렇게
통한의 한 세월 건너가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