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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869
· 쪽수 : 307쪽
· 출판일 : 2022-07-11
책 소개
목차
아픔이 노래가 되는
멈춰진 시간의 기억
진화하는 학습 이론
도돌이표가 없는 연주
멀티시대의 초대 방식
그리움에 시간표는 없다
파도 위 걷기
탁 선생의 경매물
순임이와 장닭
해설 _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홉 번의 연구 / 이승하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녀도 연습할 때마다 매번 한두 곳을 놓쳐버리는 라흐마니노프의 3번. 그는 정말 악취미를 가진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런데도 도전해 볼 테야 하는 심보로 작곡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특이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의 다음 옥타브 ‘솔’까지 무려 12도를 짚어낼 수 있는,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가 미국에 망명해 친구로 지내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완벽하게 그 곡을 연주하자, 내 생전 이 곡을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을 줄은 몰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그 곡을 물 흐르듯이 연주하려면 1초에 60번의 날갯짓을 한다는 벌새처럼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날아다녀야 하는 그런 곡이라는 걸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아픔이 노래가 되는」 중에서)
산의 침묵, 자연은 침묵의 대화를 나눈다. 내면에 있는 무수한 조각들을 모아 그 모양을 확인하며 가슴 안의 진실을 밝히려 든다. 침묵할수록 더 많은 소리가 들려온다. 밝혀야 할 게 없는데도 압박하는 때가 있다. 침묵의 강이 흐른다. 침묵이 두려울 때가 있다. 히말라야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그랬었다. 달빛이 산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밤의 고요. 거기서 오는 두려움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 자연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 그런 소통을 멈춘 침묵, 그건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히말라야 14좌 중 여덟 번째로 높다는 마나슬루, 거기서 침묵이 가져오는 고요의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은 아직도 날을 세워 다가온다. (「멈춰진 시간의 기억」 중에서)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운명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인생은 그렇게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놓여 있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처지라면 굳이 길을 찾을 고민을 할 일이 없을 거다. 그래도 알고 있는 게 있다면 가는 방향 정도일 거다. 그런 것을 의식이라 한다. 그래 의식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단지 철로 위를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뿐, 달리 선택할 길은 없다. 엄마와 자신이 살아온 길이 마치 철로 위를 따라가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도, 남편 민수도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돌이표가 없는 연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