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1155150
· 쪽수 : 213쪽
· 출판일 : 2021-10-27
책 소개
목차
004 작가의 말
006 추천사 │ 최 정
010 순진한 간호사
012 낡은 신발
014 우리 엄마
016 진료비 줄이는 법
022 창덕궁
026 아름다움과 더딤의 노화
032 고추 사건
035 철도파업, 철도민영화
039 내 사랑 안동
044 미국 대사관저
047 대통령과 시위
054 아버지와 세숫대야
056 복권
058 엉덩이가 빠진 칼국수
061 나의 은인 방 신부님
071 간화선이란?
075 세 동창생
078 대학과 지하철역
081 목욕탕 이야기
084 사형수 내 친구가 감옥에서 보내준 100만 원
090 “기 천 불”
094 한 눈으로 보는 세상
098 영수의 크리스마스 달걀
101 대갈통 사건
107 중국 4대 미녀
114 어머니의 두 마음
121 야구선수가 짜 준 카디건
125 세심한 싱글남이 알려주는 빨래 박사 되는 법
130 바보
135 면역력
138 누나와 교복
142 나를 살린 암
147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53 두 남자의 비밀여행
158 연극을 알게 해준 최헌진 과장
164 세 남자의 바람 끼
166 재미있는 세계사 [스페인과 영국의 이기주의]
171 송자 누나
175 학교 이야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순진한 간호사
혹시라도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한번 눈여겨보세요. 주사실, 응급실, 석고붕대실, 처치실 이런 것들이 보이나. 처치실이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주사나 약을 투약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장소입니다. 보통은 간호사실 내부에 있지요. 링거병에 노란 앰플들을 섞거나 약 봉투를 확인하거나 뭐 그런 일을 하는 장소입니다. 간호사들이 “처치하러 가자!” 라는 말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으러 가자는 말이고. “지금 처치 시간인데요.”라는 말은 병실 환자에게 주사를 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처치라는 말이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용되면 엄청나게 무서운 말이 됩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생명을 끊는 것을 “처치한다.” 라고 하지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 면허를 받아 처음 출근한 병원의 근무지가 내과 병동이었는데 간호사 18명과 간호조무사 8명이 환자 80명을 봐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전쟁터였지요. 신규 간호사이니 처음 1년간은 주사기 한번 못 만져보고 근무시간 내내 혈압을 재거나 각종 검사물 채취로 시간을 보냈지요.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어느 날 밤 근무 시간이었습니다. 낮 근무나 오후 근무 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회가 온 것이지요. 평소 저를 예쁘게 봐주던 선배 간호사가 “윤 선생, 오늘은 네가 406호 환자 처치해볼래?”라고 하셨지요. 다시 말하면 저에게 근육주사를 놓을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저는 그 처치를 서부영화에서의 처치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지요. 그 당시, 406호 환자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고 의식도 가끔 없어지고 해서 하늘로 갈 날만 기다리던 환자였습니다. 저에게 처치하라는 선배 간호사의 말을 듣고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엉엉 울면서 “선생님 왜 저보고 죽이라는 거예요? 저 사람 못 죽여요. 간호사가 사람도 죽여야 하나요?”
그 뒤 반응은 여러분께 맡깁니다. 제가 이런 간호사였습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풋풋하고 상큼한 새내기 시절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낡은 신발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한다. 새 차, 새집, 하다못해 돈도 새 돈이 좋다. 그런데 새것보다 헌것이 좋은 게 있다. 신발이다. 특히 구두는 적당히 신어서 길이 들여진 조금은 헌것이 최고다. 누구든 새로 구두를 사면 우선은 걱정부터 생긴다.
얼마 전, 청계천 황학동 도깨비시장을 살피다가 예쁜 발목 구두를 하나 발견했다. 색깔도 적당히 바랬고 디자인도 내 마음에 들었고 신어보니 치수도 맞았고, 얼마냐고 물으니 5,000원 주고 가져가란다. 얼른 샀다.
집에 와서 깨끗이 씻어 말렸고 다음날 신고 회사에 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이 아프고 걸음 걷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날은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저녁에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니 발뒤꿈치가 다 벗겨지고 피가 흥건하게 배 나와 있었다.
신발을 다시 씻어 말리고, 발은 삼사일 동안 고생을 했다. 상식을 동원하여 신발 뒤 측에 양초로 문지르고 방망이로 두들기고, 내 발에는 아예 밴드를 붙이고.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다. 디자인이 예뻐서 아침마다 그 신발이 신고 싶었고 신을 때마다 가슴이 덜컹거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신발을 신었는데 뒤 측이 아프지도 않고 발이 아주 편했다. 저녁에 벗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지금은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신발이 되었다.
신발과 사람 사이에도 이렇듯 적응 기간이 필요할진대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떨까? 우리는 잘 기다리지 못한다. 더욱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더하고.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금방 생각이 같을 수 있고 다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신발과 발이 서로 이해하고 맞추어가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조금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적당히 신어서 편해진 신발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편한 신발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