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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079462
· 쪽수 : 156쪽
· 출판일 : 2022-11-10
목차
차례
시인의 말
1부
진원지
돌의 족보를 누설하다
무지외반증
저수지에 걸려든 낮달
물의 연주법
멸치 국숫집
쌍협雙俠
동물원
폭설의 하루
오후의 국경
나의 시작법詩作法
여름 소나타
밤바다에서
숫자들
꽃불 한 점
2부
8도 33분선
의자
묵은 것에 관하여
여름의 기록들
한여름의 가로수
불시착
채석장은 잠들지 않는다
새끼발가락
골목의 밤
방황을 쓰다듬다
불면
도서관의 봄
숫자에 갇히다
빈집에 봄이 물들다
새벽 인력시장
3부
제재소에서
뒷모습
정오의 해바라기
별
높은 자리
목화솜
옐로우가 피었쩌요
토마토처럼 붉은
스캐너
수산시장
대명항 어판장
틈과 담 사이
이팝나무
행복한 식당
그림자
4부
스모킹 존
가을비
오늘은 월척
발굴
월미도에서 받아 적다
부부의 농사법
병풍 속을 걷는 노인
수평 관계
깨진 기왓장
빈 밥그릇을 채우며
살충자
감나무
약손
삼월
전철 안 스케치 불청객
해설
개성적 비유로 직조한 성찰과 연민 |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진원지
소문의 무게는 각각 다르다
눈과 귀와 입이 한데 섞여 어우러진 숲에서
자고 나면 쏟아지는 입, 입, 입
숲에는 적재 창고가 있어
종잡을 수 없는 새들이 카더라를
예다제다 물어 나른다
주장과 의견과 경험을 자양분으로 숲은 날마다
새로운 먹이로 채워 나갈 때
새들은 활자처럼 우르르 날아든다
힘없는 나무들은
벌목꾼에 의해 베어지거나
더러는 안간힘으로 버티기도 한다
사람들 조심스레 숲을 걷지만
들꽃을 보다 길을 잃거나
늘어진 가지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어둡고 축축한 이야기들 틈에서도
가끔 훈훈한 미담이 귀퉁이 숲에 걸린다
가령 쓰러진 나무가 약한 나뭇가지를 치켜 준다던가
오솔길에 그늘이 되어준다던가
달달한 소문일수록 출처는 금방 드러나지만
새들이 온갖 것을 물어 나르는 숲의
진원지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돌의 족보를 누설하다
돌에도 족보가 있다
본과 항렬이 있어 땅속에서도
서열을 알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뒹굴고 부딪쳐도 본분을 잃지 않는 건
대대로 내려온 혈통 때문이다
채석장 암벽에서 사막의 모래알까지
빠짐없이 수록된 돌의 내력,
망치로 정을 내리치면 알 수 있다
쪼이고 파이고 깎일지라도
출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둘러보면 끼리끼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냇물에 놓인 디딤돌이나
돌로 섞어 지은 토담집이나
절벽 위 바위마저
모두 경륜을 채워가고 있다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눈 비 햇살과 구름을 스쳤던 기록이
단면에 무늬로 새겨져 있다
좌대에 앉혀놓은 수석이
오늘 시詩 한 자락 붙잡고 끙끙거리는 나에게
얼마나 깊이 새겨 왔느냐고 묻는 듯하여
내 시의 족보가 부끄러워
공손히 돌을 닦아주었다
오후의 국경
나무가 바람을 흔들며 햇볕의 경계를 넘어선다
파열되는 그늘 너머
피사체같이 우뚝 서 있는 오후가
검문 없이 국경을 넘나들 때
길은 차들을 갱신해 간다
낯선 곳에서 방전된 휴대폰처럼
아무 쓸모없이 샛길이 이어진다 그 끝,
편의점 간판이 주야로 불빛을 켜두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도 바코드로 읽혀
숫자로 수속되는 것일까 광학적인 허기가
채 가리지 못한 블라인드 사이로 비친다
그림자가 다가와 유리창에 기댄 테이블 앞,
컵라면 뚜껑에 한 손을 얹은 사내가 있다
그 3분의 유효시간
틈에서 새어 나오는 김이 팔뚝을 감아 오른다
살갗에 길들어진 새 한 마리,
만료된 여권처럼 깃털이 푸르스름하다
창밖에 구름이 한차례 밀항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