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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651408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5-09-15
책 소개
목차
1부
산수국·13
호우주의보·14
명랑의 세계·16
죽음의 체적·18
카스텔라·20
화양연화·22
정오·24
뼈를 더듬다·25
오늘은 낮달·26
수몽·28
여우창문·30
누가 화분에 나를 심었나·32
반지 분실·34
외박·36
오래된 관계·38
잠에 눈이 쌓였다·39
2부
덧칠·43
눈사람이 서 있다·44
사루비아·46
무료한 사람들·48
밤의 트라우마·50
질감·52
파도가 다는 아닌 가파도·54
일기예보·56
윤달·58
개구리는 물방울 몇 개 모자로 쓰고·60
어딘가를 조금 잘라냈습니다·62
아다지에토·64
꽃은 내 귓바퀴를 돌아와·66
여긴 정거장이 아닙니다·68
죽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 해서 좋았다·70
당신을 해치고 싶은 배역을 꿈꾸지·71
3부
죽음에선 흰꽃나도샤프란 향기가 난다·75
리어왕 증후군·76
환승한 버스에서 허브 냄새가 났다·78
탱고 한 곡 출까요?·80
긴 겨울밤의 화투점처럼·82
안녕, 마리아·84
길고양이 출몰 구역·87
어제가 있었다·88
꽃게·90
길은 어디로도 가고 아무 데도 못 간다·92
아무의 여름날·94
몸에 두 개의 달이 뜬다·96
내일도·98
역할 대행·100
콜드건·102
스콘을 굽다·104
다른 행방·105
해설 | 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자아의 해체와 새로운 정체성의 탐색·107
저자소개
책속에서
김순옥의 시집 『누가 나를 심었나』는 이렇게 타자의 욕망 속에서 해체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응시이다. 그의 시들은 자아의 경계가 해체되고 그 파편 속에서 낯선 정체성이 움트는 과정을 실험적인 언어와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이 시집의 시들은 전통적인 서정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육체와 분열된 정체성, 타자화된 자아, 존재의 불안정성을 다루고 있다. 주체는 더 이상 고정된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정체성이 지연되고 환유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끝없이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불안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 불안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태를 탐색한다. 김순옥 시인에게 자아의 해체는 곧 새로움의 가능성이다.
보시다시피
모래밭에 누워 있습니다
아니 유리창입니다
하늘을 보면 구름이 짖는 소리
깨진 물동이를 머리에 인
개구리들이 뛰쳐나와
짖지 말고 울어라
짖지 말고 울어라
개구리 다리를 잡아당기면 불쑥,
튀어나오는 여름
저음의 나와 고음의 너 사이로
후둑 후두둑, 쏟아지는 비
떠다니는 거리의 발뒤꿈치에서 터지는 소리
막 솟아오르는 호박잎을 타고
막대를 든 엄마가
내 몸을 빌려 푸른 복숭아를 베어 뭅니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여름 한 무더기
일제히 깨어지고 순간 사라져 버린 후
바람에 끌려간 창문은 보시다시피
빗방울을 몇 개나 삼켰는지 몰라 창백합니다
― 「개구리는 물방울 몇 개 모자로 쓰고」 전문
이 시는 자아의 해체라는 주제를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자아란 더 이상 일관된 중심이 아니며, 감각, 기억, 타자와의 경계,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조각나고 흩어지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보시다시피/모래밭에 누워 있습니다/아니 유리창입니다”라는 첫 연의 시행들부터 화자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다. “모래밭”에서 “유리창”으로 전이되는 이 변화는 육체적 정체성조차 고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는 자아가 더 이상 고정된 ‘나’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 환경이나 시선에 따라 변화하고 해체될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 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그래, 또 나야
하루 종일 나를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모란이 피었던 곳에 옆구리가 생기고
굵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장대 위에 흩어진 분홍색 파우더처럼
어떤 순서도 없이
둥근 저녁은 둥근 어둠을 반죽으로 치대고
귀만 돌아다니는 고요 속,
가끔은 식물인지를 모르게
눕기도 했다
떠오른다 떠오른다는 생각으로
식물이 만지는 오른손이 시들까 봐
슬쩍 화분을 밀치는 손
옆구리에 쌓인 눈발이 유일한 다정인 양 쓰윽,
당겨 본다
삿포로에 갈까요?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발자국을 따라 흰색이 가득할 테니 서로 의심이 없겠죠
숨을 뱉을 때마다
여섯 번째 손가락에 생긴 물집 속으로
쓸쓸하다는 눈덩이가 하나씩 채워졌다
녹는다
― 「누가 화분에 나를 심었나」 전문
풀잎이고 돌멩이고 구름이고 절룩이는 한 사람입니다 머리인지 황량한 산인지 들판인지를 질끈 동인 여자입니다 온통 나로 시작하는 도시를 떠나 당신께 당도합니다 걷는 동안은 세상이 좀 더 크게 보일까 봐 걸음을 모아 시위에 화살을 걸고 과녁이 됩니다 단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다면, 당신에게 나는 푸른 신호등이었습니까? 그 사람, 그 나무, 그 구름이었나요 지붕 위에 던진 썩은 어금니, 발가락에 끼운 보석반지, 까막눈으로 바늘에 눈을 꿰는 할머니, 모두가 한 여자의 이야기군요 자그락자그락 파도와 자갈이 서로를 알아볼까 겁이 납니다 (백만 번 죽었다가 백만 첫 번째 태어나 겹겹 쌓인 바다를 건져 올릴 거예요) 업어드릴까요? 휘어진 바람을 읽는 여자가 먼 등 뒤에서 바로 눈앞에서 입과 귀로 끄덕입니다
― 「산수국」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