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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695
· 쪽수 : 300쪽
· 출판일 : 2024-11-29
책 소개
목차
염소 도둑 / 7
바람의 얼굴 / 45
폭우 / 81
첫사랑 / 117
거리두기 연인 / 153
나는 걷는다 / 187
샹그릴라 / 219
손가락이 아프다 / 247
발문
소외와 결핍에서 원융의 바다로 / 281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저놈의 새끼, 남의 염소 훔치고 있구먼. 저런 것들은 삼청 교육대로 보내야지. 손모가지든 발모가지든 분질러놔야 다시는 남의 것을 도둑질 안 하지.”
버스 안 여기저기서 암, 암, 그래야지 하는 맞장구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택시 옆을 지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도둑이 누군지 보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남자와 염소 사이 승패의 결과가 조금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고개를 든 남자는 노을빛에 반사되어 붉게 타올랐다. 아니, 온몸의 기운을 끌어내느라 핏빛이 되었는지 모른다. 남자는 두 팔 가득 염소를 끌어안고 트렁크 안으로 염소를 집어넣는 중이었다. 남자는 염소의 무게에 짓눌려 얼굴이 노을빛보다 더 붉게 불타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영모였다. 외지에 나가 있느라 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체기처럼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그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버스가 산자락을 비스듬한 곡선으로 꺾일 때까지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쳐다보았다. 그는 염소를 트렁크에 실은 뒤 버스를 따라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반드시 뭔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나는 길 건너편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숨을 골랐다. 경찰에게 또박또박 한 음절씩 알려주었다. (「염소 도둑」 중에서)
나는 낭떠러지 위로 올려졌다. 검은 파카에게 들킨 본심을 감추기 위해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사라짐은 끝이 아닌지 모른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막연한 충동에 이끌려 생명을 쉽게 놔버리는 건 한없이 비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갈망했던 나의 끝이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된다. 담장을 넘어와 한 여자의 삶을 뒤틀리게 만들고 나를 원치 않는 세상으로 내보내 어둠의 통로를 지나게 만든 나의 생부는 누구란 말인가. 담장을 타고 넘어가도록 그의 등을 떠민 바람은 어디서 불어왔던 것일까. 산 정상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바람, 더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서서 처음으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바람의 얼굴」 중에서)
하지만 그에게로 향한 또래들의 구애는 경쟁이 치열했다. 짝사랑이 늘어갈수록 내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시기와 질투는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잠 못 이룬 밤이 늘어나고 불안은 점점 불어났다. 어느 날에는 그의 파장이 나에게만 감응한 것이 아니라 또래들 모두에게도 같은 반응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통 감정이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쉽사리 절망에 떨어지곤 했다. 그와 사제지간이라면 도리를 지키면서 제자로서 잠잠한 감정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미친 듯 솟아오르는 감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한 아이가 그를 향해 들끓는 감정으로 매일매일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동화 속 백마 탄 기사처럼 은빛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온몸으로 빛을 내뿜었다. 게다가 수업을 진행하는 몸짓은 얼마나 열정적이던가. 목소리는 우렁찼고 동작은 힘이 넘쳤다. 그의 에너지는 온 교정을 헤집어놓고도 넘칠 만큼 충만했다. 그 열정에 감염된 또래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날의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는 집과 가족관계, 음식과 취미생활, 운동과 종교, 심지어는 애인의 유무까지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시시콜콜한 수다를 통해 남김없이 공유되었다. 학교생활은 그가 중심축이고 나는 위성처럼 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첫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