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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862
· 쪽수 : 306쪽
· 출판일 : 2025-05-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_ 진실을 탐구하는 작업의 쾌미
순결한 여인 / 11
-1970년대 풍경화
해인사를 폭격하라 / 87
귀국선 우키시마호 / 153
인지 수사 / 263
-아직도 여전히 답답하게
저자소개
책속에서
송안나는 말없이 맥주를 따라 마셨다. 말을 하고 보니 허전한 것이었다. 그녀가 담배를 물고 라이터 불을 켜 붙이더니 깊게 빨아 연기를 후 허공에 날렸다. 그녀 눈에 눈물이 어렸다.
“나가 누나의 사연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훨씬 더 잘해주었을틴디 시피보고(쉽게보고) 말았단 말이요. 미안합니다이. 정말로 미안합니다이. 이렇게 순결한 우리 누님을 누가 매정스럽게 했을까요이, 진실로 정성으로 모실랍니다. 충성을 다하겄습니다.”
송안나가 그를 빤히 건너다 보았다.
“나는 갈 거야. 내려갈 거야.”
“예? 출세해야 하는디요? 나가 여그서 누님 알뜰하게 모실라는디요?”
모처럼 출세하는 길이 열리고, 그녀 신분에 맞는 일이 주어졌는데 내려간다고? 모두들 출세를 위해 서울로 모여들고 있는데, 퇴락한 항구도시로 다시 돌아간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야지 올려보내고 내가 삼학도를 지킬 거야. 거기서 다시 사랑을 만들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요? 좆되는 것 아니요?”
“네 번째 사랑이 되는 거지.”
기후 따뜻하고 인심 넉넉한 곳, 사심없는 욕지거리가 오히려 다정한 곳, 거친 듯하나 모두가 명랑한 그곳이 이제 그녀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곳이라면 언젠가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것 같다고 믿었다.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이 성자처럼 나타날 것 같다. 송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결한 여인-1970년대 풍경화」 중에서)
장지동이 부대로 돌아와 김영대에게 보고했다.
“지금 당장 2개 편대를 편성해 해인사를 폭격하라고 합니다. 이머전시 콜입니다.”
“미친 새끼들.” 그가 화를 내며 덧붙였다. “해인사라면 천년 고찰인데, 성냥갑 부수듯이 부수라고? 나라의 보물이자 세계적인 불교문화 유산이 보존돼 있는 곳을 때려부숴? 미친 새끼들…”
장지동도 같은 생각이었다. 김영대가 투덜거렸다.
“장지동 너 불도(佛徒) 아니냐?”
“그렇습니다. 형님은 기독교고요.”
“기독교지만 실상은 잡교야. 좌우지간 기독교도든 불도든 이건 안돼. 지동이 너 프랑스 와이장 방위사령관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왜요?”
“항복으로 파리를 지킨 장군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파리를 지키던 와이장 방위사령관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막강 독일군이 공격하면 파리가 완전 파괴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와이장은 파리가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이냐 항전이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항복을 택했다.
“와이장 장군은 파리를 사랑했지. 그래서 오늘날 파리가 온전히 보존된 거야. 장군으로서는 최대 수치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항복했지만, 조국의 수도를 살린 영웅이야.”
“그럼 우리도 폭격을 막자는 겁니까?”
“두말하면 개소리지. 미군놈들은 생각보다 무식하잖나. 정신적 사유가 없어. 문명이 뭐고, 유물이 뭔지 모르고, 때려 부수려고만 해. 실적주의에만 빠져있어.”
“하지만 미군도 태평양 전쟁 중 교토를 폭격하지 않았잖아요.”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지휘관 퍼스낼리티에 따라 문화재가 보존되느냐 멸실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야. 전쟁은 개인적 선의만 믿을 수 없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고도 교토와 일왕이 살고 있는 도쿄의 궁성은 폭격 목표에서 제외했다. 유적·유물은 한 번 부서지면 재생시킬 수 없으며, 그것은 피아 구분을 떠나 인류 전체의 손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 지성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불행을 막은 것이다.
“미국 문명인은 한국전쟁엔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우리가 나서야지. 인민군이 해인사를 점령한 것은 식량 확보 차원일 뿐이야.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놈들을 격퇴할 계획을 생각해봐.”
“인민군이 식량을 확보하면 지들 아지트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죠? 그때 우리가 그 루트를 뒤따라가서 밟아버리면 됩니다.”
“그래, 그렇게 작전을 짜라. 그렇게 되면 너 역시 와이장 장군이 된다.”
“아닙니다. 형님이 와이장 장군이죠.”
두 사람이 의기투합을 확인하고 라인으로 돌아오는데 미 고문단 대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복에 부착된 이름표에 6146부대 W. 윌슨이란 이름이 박혀있었다. 그가 김영대 앞에 서더니 따져물었다.
“전대장인가?”
“그렇다.”
“왜 출격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명령을 거부하나? 당신 군법회의 알간?”
(「해인사를 폭격하라」 중에서)
자칭 광야의 선지자 요시다 상이 일장 연설을 했다.
“어린 소년 비행사들을 태평양 바다에 수장시켜 놓고, 그 뼈다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을 주워다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놓고 허리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시오. 우습지 않소? 신풍이니 신화니 하며 머리 조아리는데 바로 사기지. 또 조선인 강제징용자나 종군위안부를 잡아간 자들을 칭송하디니... 전범 일왕은 자기 대신 아랫놈을 처벌하는 시늉을 하는데, 여러분은 속지 마시오, 그 원흉을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오. 일본이 해야할 일은 전쟁광의 뼈를 야스쿠니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야만의 전쟁에 희생된 억울한 사람들을 모셔야 하오. 그것이 진정한 화해고 반성이고 평화지. 전쟁으로 희생된 일본군위안부나 강제 징용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면 단 1달러의 배상금도 받을 필요가 없소.”
해룡호는 조선인 일본 육사생도들을 태우자 더 이상 지체할 것 없다는 듯 만을 빠져나갔다. 배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데 비로소 자유인이 된 기분이었다. 돌아보니 요며칠 사이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것 같았다. 비현실적 몽환 속에 빠져든 기분이었다. 하긴 일본 패전의 혼란상이 극에 달해 있었으니 어느 것하나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없었다. 패망일로부터 한달 여의 기간이 마치 수십 년의 풍상을 겪은 것만 같았다. 그들은 갑판의 바닥에 둘러앉아 조국의 미래를 그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본 광야의 선지자 요시다는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선미 쪽으로 가 서서 우두커니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그가 돌아와 말했다.
“나는 저 앞에 보이는 섬에 내려주시오.”
숲이 무성하게 자란 조그만 무인도였다.
“무인도입니다. 살기 힘듭니다.”
“무인도니까 내 세상이오. 저곳에 묻혀 살겠소. 저곳이 내 이상향 같소. 세상 잡사 모두 잊고 사는 낙원 같소. 내려주시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일본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나를 통해 말해주고 싶다는 거요. 조선 민족이 고통받은 것에 대해 내 개인적으로라도 사죄하고 싶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거요. 돌아가서 좋은 나라 만드시오.”
작은 섬 기슭에 배를 접안시키자 그가 훌쩍 배에서 뛰어내렸다. 생도들이 닥치는대로물건을 챙겨서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배는 곧 출발했다. 배가 가물가물 점이 될 때까지 요시다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있었다.
(「귀국선 우키시마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