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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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평남 성천군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고,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1년에 제적되었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1931년에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출옥 후에 감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하고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 문제를 놓고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도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 임화·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장편 ≪대하≫(1939), 연작인 ≪경영≫(1940)과 ≪맥≫(1941) 등을 발표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전쟁에도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했으나, 1953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남천도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53년이나 1955년에 사형당했다는 설, 1977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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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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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언어로 한국 문학사의 큰 발자취를 남긴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서 아버지 청풍 김씨 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이남 육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오고 재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지만 중퇴한 후 고향 춘천 실레 마을로 내려가 금병의숙을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금광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금광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고향에서 보고 느꼈던 농촌 배경의 토속적 정취를 녹여낸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고 채만식·박태원·이상 등과 교류 하며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떡〉 〈만무방〉 〈봄봄〉 〈안해〉 등 열한 편의 소설과 수필 세 편을 발표해 문단의 찬사를 받고 후기 구인회 동인으로 참여한 후 이태준, 이상과 깊은 친분을 쌓는다. 그는 이때쯤 치질과 늑막염이 악화한 상태로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까지 받고 고통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농촌에서 우직하고 순진하게 살아가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 실상을 특유의 해학적 수법으로 표현한 단편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음악회〉 〈동백꽃〉 〈야앵호〉 〈옥토끼〉 〈정조〉 〈슬픈 이야기〉와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아〉 〈길〉 〈행복을 등진 정열〉 〈밤이 조금만 짤렀드면〉 등을 발표하고 미완의 장편 〈생의 반려〉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불과 이 년 남짓한 작가 생활 동안 삼십여 편의 단편과 한 편의 미완성 장편, 두 편의 번역 소설, 열두 편의 수필과 편지와 일기 여섯 편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다 지병인 폐결핵에 시달리다 1937년 3월 29일 꽃다운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유해는 친구, 형제, 조카들에 의해 화장한 후 한강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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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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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의 교사였던 아버지 이시후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일생의 벗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현민 유진오를 만나면서 그와 더불어 문학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경성제국대학에 함께 진학하여 더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오 등과 함께 경향소설을 쓰며 동반자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이효석이 작품 세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경성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다. 이후 평양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안정된 집필 환경 속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고,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던 그는 1940년 아내와 아들의 잇단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잠시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돌아왔으며, 다시 창작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지만 뜻을 펼치기도 전에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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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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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백릉이며,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14년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중에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결혼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여 만에 그만둔다.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그 뒤 〈산적〉을 비롯해 다수의 소설과 희곡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2년 〈부촌〉, 〈농민의회계〉, 〈화물자동차〉 등 동반자적인 경향의 작품을, 1933년 〈인형의 집을 나와서〉,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1936년에는 〈명일〉과 〈쑥국새〉, 〈순공있는 일요일〉, 〈사호일단〉 등을, 1938년에는 〈탁류〉와 〈금의 열정〉 등의 일제강점기 세태를 풍자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장편 소설 〈태평천하〉와 〈탁류〉는 사회의식과 세태 풍자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1940년에 〈치안속의 풍속〉, 〈냉동어〉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45년 고향으로 내려가 광복 후에 〈민족의 죄인〉 등을 발표하지만 1950년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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