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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뿌리

인간의 뿌리

이연철 (지은이)
  |  
옛길(도서출판)
2014-09-10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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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뿌리

책 정보

· 제목 : 인간의 뿌리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5278015
· 쪽수 : 308쪽

책 소개

<서촌일기>의 작가 이연철의 장편소설. 유신부와 정하상, 권진이, 김인길… 그리고 감옥에서 처참한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과 배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죄,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지, 이 소설은 묻고 있다.

목차

1부 인간의 길…………… 7
2부 광야 길 …………… 43
3부 하늘 길 …………… 107
4부 굽은 길 …………… 163
5부 돌아가는 길 ……… 251

작가의 말 ……… 305

저자소개

이연철 (지은이)    정보 더보기
- 충북 충주 출생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단편소설집 <투모로우> <안녕 지하철> - 장편소설집 <서촌일기> <인간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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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부 - 인간의 길

1

중국 섬서성(陝西省).
바람이 한차례 불자 하늘과 땅이 누렇게 변했다. 황사다. 봄만 되면 이렇다. 가뭄이 들면 여름 내내 누런 세상이다. 물이 귀한 마을이어서 목욕은커녕 얼굴 씻기도 쉽지 않다. 저녁이면 얼굴이며 옷에 먼지가 부옇게 앉아 마치 노란 분을 바른 것 같지만 그냥 툭툭 털고 잔다.
마을은 야트막한 구릉을 등지고 있다. 구릉에는 나무 한 그루 없다. 메마른 사막 같은 곳. 사람들은 황토를 구워 벽돌 집을 짓거나 구릉에 토굴을 뚫고 산다.
마을 한복판에는 고래등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여항덕(余恒德)네 집이다. 인근 천 리 안에서 제일 부자다. 항덕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항덕의 기억 속 엄마는 늘 치파오(旗袍)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굴곡진 몸에 착 달라붙은, 허벅지 깊숙이 옆트임 된 치파오. 눈에는 붉은 기운이 넘쳤다. 요염했다. 엄마는 매일 치파오만 입었다. 아버지가 좋아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가끔 입고있던 치파오 끝자락을 들추며 어린 항덕에게 자랑했다.
「치파오를 입고 있으면 네 아버지가 그랬지. 내가 사방 백 리 안에서 제일 예쁘다고.」
항덕은 드러난 하얀 허벅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엄마는 항덕의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항덕의 등을 가볍게 찰싹 치며 눈을 흘겼다.
「어린 녀석이 사내라고, 호홋!」
아버지가 다른 부인의 방에서 잘 때도 엄마는 새빨간 치파오를 입었다. 그리고는 밤새 분노에 찬,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안을 서성였다. 때로는 한들한들 허리를 꺾으며 노래를 불렀다.

저 밭고랑에 가뭄이 드네.
내 가슴에도 가뭄이네.
이 황사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네.
이 가문 가슴에 누가 비를 내려줄까.

허공에 맴도는 소리.
가뭄에 타는 그 소리.

오랜 가뭄에 논도 밭도 다 갈라지고
메마른 논두렁엔 들쥐들만 기어간다.

허공에 맴도는 소리.
구천까지 울려퍼진다.

가뭄에 비가 내리라고 부르는 노래였다. 가뭄 때의 태양처럼 뜨거운 노래였다. 엄마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열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속에서 불길이 확확 일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엄마가 치파오 자락을 휘날리며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도 엄마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래를 부르다가 성이 차지 않으면 남편이 들어간 다른 부인의 방으로 쳐들어가 소란을 피웠다. 그때마다 나이가 곱절이나 많은 큰 부인에게 불려가 종아리를 맞았다. 그런 일이 여러 번 거듭되자 남편은 항덕의 엄마가 무서운 여자라며 발길을 끊어버렸다.
엄마는 여전히 치파오 차림이었고, 밤마다 항덕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항덕은 그게 좋았다. 엄마의 뜨거운 숨결과, 뭉클한 가슴과, 뺨에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이 좋았다. 혀를 내어 맛을 보면 찝찔하면서도 달콤했다. 엄마가 매일 더 자주 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몸은 뜨거웠고 질투 역시 식지 않았다. 오히려 질투는 더 뜨거워졌다. 펄펄 끓도록. 엄마는 밤늦게까지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방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는 몸에 열이 오르면 옷을 죄다 벗었다. 하얗게 빛나던 나신. 몰래 엄마를 지켜보던 항덕은 현기증을 느꼈다.
어린 시절 한밤중에 보았던 어둠 속의 자작나무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어딘가 놀러갔을 때 보았던 자작나무 숲. 어둠 속에 발가벗고 조용히 줄지어 서있던 자작나무. 그건 경이였다. 무서운 풍경이었고, 동시에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었다.
엄마의 나신을 통해 그 자작나무를 다시 보는 순간 항덕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오줌을 지렸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오줌은 엄마 눈물만큼이나 따뜻했다.
엄마는 남편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웃집 하인과 몰래 만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웃집 주인이라도 죽음을 면키 어려운데 하필이면 하인과 눈이 맞다니. 아버지의 눈이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이웃집 하인은 붙잡혀 와서 멍석말이로 죽었다. 아버지가 직접 몽둥이를 들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의자에 앉혀놓고 하인이 뭇매에 죽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하인이 숨을 거두자 엄마는 하늘을 향해 한바탕 깔깔깔 웃고는 말릴 새도 없이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때도 엄마는 치파오 차림이었다. 줄에 매달아 끌어올린, 이미 숨이 끊어진 엄마의 날씬한 몸은 활처럼 휘어졌고, 허연 허벅지를 드러내며 젖혀진 치파오 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가장 서럽게 운 사람은 항덕이었다. 사람들은 효심이 지극하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엄마의 뜨거운 숨결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프고 또 슬펐던 것이다.
사람이 죽은 우물은 귀신이 나오기 때문에 메워야 했지만 물이 귀한 마을이어서 무거운 나무 뚜껑을 만들어 덮기로 했다.
항덕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무서운 씨앗이라며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효심이 있다고 쫓겨나지는 않았다. 항덕이 열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2

항덕이 머무는 뒤채에서는 우물이 빤히 보였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우물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뚜껑을 덮었어도 귀신이 나온다고 했다. 나무 뚜껑으로 막을 수 있다면 귀신이 아니라고 했다.
어두워지면 우물은 항덕의 차지가 되었다. 밤이면 항덕은 우물을 빙빙 돌며 노래를 불렀다.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래를. 그저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음률을 토해냈다.

저 밭고랑에 가뭄이 드네.
내 가슴에도 가뭄이네.
이 황사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네.
이 가문 가슴에 누가 비를 내려줄까.

허공에 맴도는 소리.
가뭄에 타는 그 소리.

사람들은 뒤채 담을 넘어 들려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슬프다고 했다. 세상의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귀신의 노래라고 수군댔다. 사실은 항덕 앞에서 엄마가 부르던 노래였는데. 그 노래가 어느새 항덕의 가슴에 뿌리박혀 있다가 튀어나온 것인데.

항덕은 점점 외톨이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한 때 즐거운 시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풍류를 좋아하다보니 재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집에서 머물렀다. 항덕은 풍류객 중에서 변검사(變臉士)를 만났다. 사천성 사람이라 말이 잘 통하지 않았으나 눈빛으로 뜻을 주고받았다. 변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의 얼굴로 변하는 재주였다. 변검사는 이 방면의 고수였다.
항덕은 변검술에 빠져들었다. 마음껏 변신하는 삶. 그의 꿈이었다. 어떤 얼굴은 무서웠고 어떤 얼굴은 재미있었다. 어떤 동물은 사납고 또 어떤 동물은 귀여웠다. 뒤채에서 혼자 지내는 그에게는 이보다 흥미있는 일도 없었다.
「내 스승도 서른여섯 가지밖에 못했다.」
늙은 변검사는 가슴을 내밀며 으스댔다. 그는 한 자리에서 무려 마흔여덟 개의 얼굴로 변신할 수 있었다. 큰소리칠 만 했다.
변검사는 여러 달 묵으며 항덕에게 변검술을 가르쳐주었다. 재주가 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남들은 몇 년 배워야 한다는 변검술을 항덕은 손쉽게 터득했다. 불과 반 년도 안 되어 여섯 개의 얼굴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만하면 됐다. 밥벌이로 나설 것도 아닌데. 혼자 노력하면 서너 개까지는 더 할 수 있을 거야.」
늙은 변검술사는 떠나가기 전 항덕에게 당부했다.
「너에게는 음란한 기운이 있구나. 네 어미 말을 들었다. 변검을 아무 곳에나 사용하지 말아라. 네가 뒤채에서 혼자 지내는 게 불쌍해서 가르쳐준 거니까.」

뒤채에서의 그늘진 삶.
스물일곱의 나이가 되도록 항덕은 스스로 가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변검과 우물가를 돌며 부르는 노래가 전부였다.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무섭다며 여전히 뒤채 우물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앞마당에 우물이 생기면서 뒤채는 발걸음을 끊다시피 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귀신이 나와 설친다는 소문이 돌아 앞마당에 새 우물을 판 것이었다. 항덕은 우물을 돌며, 노래를 부르며 귀신 얼굴의 변검놀이를 했다.

3

집에서 한 마장 떨어진 곳에 천주교 공소(公所)가 섰다. 오 년 전의 일이지만 밖에 나가지 않는 항덕은 전혀 몰랐다.
어느 가을 밤에 우물가에서 혼자 변검놀이를 하다가 노래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고, 염불도 아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뭔가 묵직하면서 가슴을 헤집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자기가 부르던 노래와는 많이 달랐다. 서글프지도 않고 애잔하지도 않았다. 항덕은 가면을 벗었다. 이제 장골이지만 맨얼굴은 소년처럼 맑고 해맑았다.
항덕은 뒤란의 쪽문을 열고 나갔다. 마른 잡초가 우거졌다. 시원했다. 뒤뜰에서 맡는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이슬에 젖은 잡초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항덕은 소리를 따라 걸었다. 소리 끝자락을 놓치지 않고 마을을 지나 논과 밭을 가로질렀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 마냥 소리를 좇았다.
얼마 후에 작은 벽돌집에 다다랐다. 그곳이 공소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파란 서양 사람이 손으로 묵주를 돌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염경기도였다. 이상한 노래는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처음 본 서양 사람이지만 변검에 익숙한 항덕에게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했다.
천주교 사제가 전교(傳敎)를 위해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어느 곳보다 개방적인 섬서성 사람들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볼 것 없고 사람도 많지 않은 이 시골에 어떻게 공소가 서게 되었는지는 오직 천주님만 알 일이었다.
공소가 세워진 지 오 년이 다 되었지만 사람들은 공소에 가기는커녕 천주교의 천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서양귀신이라며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씨 좋은 이그나치오 신부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전교를 하려고 애썼다.
항덕은 그날 이그나치오 신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풍성한 턱수염과 너그러운 미소가 맘에 들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한 번도 던지지 않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집에서 공소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잠든 밤이라고 하지만 조용히 읊조리는 염경기도가 한 마장이나 떨어진 항덕의 귀에 들린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그나치오 신부는 이것이야말로 천주님의 부름이라며 기뻐했다.
항덕은 집안사람 모르게 이그나치오 신부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그나치오 신부는 중국말에 서툴렀지만 더없이 친절하게 천주가 누구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가르쳐주었다. 천주님이 죄 많은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 희생양 삼으셨다는 대목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그대로 믿음으로 뿌리내렸다. 항덕은 변검을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라틴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신앙은 이해되는 게 아니라네. 그냥 믿어지는 거지.」
기도할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뒤채에서 죽은 세월을 보낸, 하찮은 자기를 위해 천주님의 외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는 예수를 닮고 싶은 그리움으로 사무쳤다.
이그나치오 신부는 여항덕을 볼 때마다 아쉬워했다.
「형제님 나이가 적었으면 사제 수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여항덕은 매일 밤마다 공소에 가서 이그나치오 신부와 천주의 사랑에 대해서 배웠다. 엄마에게 배운 노래도 부르지 않고 변검놀이도 그만 두었다.
삼 년 만에 아버지에게 공소에 다니는 사실을 들켰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이 빌어먹을 자식! 뒷방에 쳐박혀서 뭔 짓하나 했더니 겨우 서양 귀신과 지랄을 하고 있었던 거냐!」
하필이면 많고 많은 귀신 중에 듣도 보도 못한 서양 귀신을 섬기느냐며 아버지가 직접 몽둥이를 들었다. 아버지가 항덕에게 몽둥이로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
항덕은 몽둥이찜질이 달콤하고 시원했다. 자기를 버린 줄 알았던 아버지의 매질. 거기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에 공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도 버린 자식이라며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4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열일곱 살짜리 아내를 맞아들였다. 리리(梨梨)였다.
여름 날 붉은 가마를 타고 새 식구가 된 리리는 죽은 엄마처럼 늘씬한 키에 아름답고 당돌했다.
봄부터 가물더니 여름이 되어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황사가 부옇게 떠다녔다. 얼굴을 문지르면 손바닥에 노란 먼지가 묻어나올 정도였다.
「무슨 날씨가 이리 더워. 목욕을 해야겠어.」
리리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뒤채 우물가에서 목욕을 했다. 뒤채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풍성하고 차가웠다. 하인이 귀신이 나온다고 일렀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귀신? 흥! 귀신쯤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젠장. 난 세상에 두려운 게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 미인께서 환갑이 넘은 노인에게 시집오겠어?」
항덕은 공소에 갔다가 자정 넘어 돌아오기 일쑤여서 리리가 뒤채 우물에 와서 목욕을 하고 간다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다.
어느날 일찍 돌아오다가 리리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다. 어둠 속에 우뚝 서있는 자작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풍경.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혀 있던 허연 뿌리. 어두운 세상을 떠받힌 듯 하던 뿌리.
나신으로 물을 끼얹던 리리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항덕을 보고도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게 누구야?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아드님이군. 서양 귀신에 미쳤다는---.」
리리는 몸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짧게 킥킥 웃었다.
「뭘 봐. 뭘 뚫어지게 보느냐구. 여자 벗은 거 첨 봐?」
항덕은 반말이 싫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도 내가 엄마야, 엄마. 나한테 인사를 깍듯하게 해야 한다고.」
항덕은 자신이 놀랄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어머니. 건강하신지요?」
「건강은 무슨 건강!」
자작나무는 까르르 짧게, 부끄러움 없이 웃었다.
그날 이후 리리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리리의 환영을 지우려고 애쓸수록 선명했다. 아니다. 애초부터 지울 마음이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천주님 대신 그녀를 묵상하기 시작했다. 자작나무 같은 그녀를. 엄마 때문에 여자에 대해 질린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리리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녀의 가볍고 날렵한 발걸음 소리가. 종달새 같은 목소리가. 샐쭉하게 뜨는 눈이. 오른쪽에만 깊게 파이는 보조개가. 엄마를 닮은 치파오 입은 모습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까르르 웃는 모습이 좋기만 했다. 아, 머리카락도 있다. 만지고 싶은, 거친, 검은, 굵은, 짙은, 그래서 무서운 머리카락. 공소에 가는 발걸음이 점점 뜸해졌다. 이그나치오 신부가 전하는 말씀이 귀에서, 마음에서 멀어져갔다.

뒤채에 항덕 혼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리리였다. 여름이 다가도록 리리는 밤마다 우물가에 와서 옷을 벗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항덕은 창문 뒤에서 그녀의 노래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가락은 달랐지만 엄마가 자주 부르던 노래와 가사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저 밭고랑에 가뭄이 드네.
내 가슴에도 가뭄이네.
이 황사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네.
이 가문 가슴에 누가 비를 내려줄까.

허공에 맴도는 소리.
가뭄에 타는 그 소리.

오랜 가뭄에 논도 밭도 다 갈라지고
메마른 논두렁엔 들쥐들만 기어간다.

허공에 맴도는 소리
구천까지 울려퍼지네.

그녀 역시 가뭄을 노래하고 있었다. 꽤 먼 지방에서 시집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뭄에 타는 가슴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항덕은 어느 결에 그녀의 노래를 가만 가만 따라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공소로 가는 발길을 아예 끊고 밤마다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리리 생각에 빠져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싶었다. 이것이 악의 뿌리인가 싶었다. 인간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그 무엇.
이그나치오 신부가 읽어준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항덕의 내면은 들끓었다.
천주의 사랑을 알고부터 그 사랑에 맞는 길을 가려고 작정했다. 기왕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그나치오 신부가 말하는, 먼 나라 이탈리아로 가서 본격적으로 수련을 받은 후 사제가 되고 싶었다. 평생 천주님을 모시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기 나라 백성들의 영혼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기를 기원했다.
이그나치오 신부 역시 진작부터 항덕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너른 땅에 복음을 전하려면 현지인 사제가 필요했다. 이탈리아에 문의한 결과 예외적인 상황을 인정해서 나이는 문제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러나 리리 때문에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있었다. 항덕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면에 숨어있는 악에 대해 전율했다. 오랜 세월 공부한 것이 다 헛것인 듯만 여겨졌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리리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벗은 리리의 환영만 보일 뿐이었다.
- 이것이 나의 가증스러운 모습인가? 이것이 내가 그동안 심고 가꾸었던 내 신앙의 참모습이란 말인가?
자신은 죄인이라고, 교리공부를 더 할 수 없다고 이그나치오 신부에게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몇 달 고민하던 그는 신부에게 에둘러 말했다.
「복음의 헌신자였던 바오로 사도도 그랬지요. 자신이 죄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자기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고. 형제님은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군요. 바오로 사도만큼이나.」
그러면서 신부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인간의 원죄에 대해 설명했다. 천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생긴 원죄는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너무 죄의식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어찌 생각하면 죄와 죄의식이야말로 인간의 뿌리이며, 신앙을 키우는 자양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신부의 조언은 항덕에게 위로가 되기는 했지만 죄의식을 해결하는 열쇄는 되지 못했다.
기도에 몰두했다. 기도만이 돌파구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도를 할 때면 유혹을 이긴 듯싶었다. 마음에 평강이 넘쳤다. 그러나 밤이면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창틈에 눈을 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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