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해병대에서 신학원까지)

김경일 (지은이)
쇠뜨기
15,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13,500원 -10% 2,500원
750원
15,25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판매자 배송 10개 7,400원 >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해병대에서 신학원까지)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신앙생활
· ISBN : 9791196648411
· 쪽수 : 381쪽
· 출판일 : 2019-03-20

목차

프롤로그

1부_____나의 해병대 시절

1. 안경을 껴도 해병대 13
2. 변비는 젓가락으로 17
3. 특수부대에 안경은 안 돼 21
4. 제대 말년 병장의 탈선 23
5. 드럼통처럼 구르다 진해훈련소 수료 26
6. 너희는 잔칫날 돼지 29
7. 곡괭이 자루는 마술몽둥이 31
8. 이별 앞에 소녀처럼 우는 소대장 35
9. 졸보기는 서러워 38
10. 산천초목도 떠는 해병대 예비역 41
11. 대못은 손으로 박아야 제 맛 46
12. 기독교인이 되어야겠다 50
13. 졸병부터 선착순 55
14. 포크로 파리를 잡냐? 60
15. 하극상에 배빠따 67
16. 일곱 번 기절하고 돌아온 소대장 74
17. 작전참모 약혼녀를 즐겁게 하라 78
18. 졸하사, 제 머리를 돌로 치다 81
19. 해병대의 가을 체육대회 84
20. 나 살고 싶어 87
21. 쌍둥이 가수의 위기탈출방법 91
22. 연평도 겨울바다는 옴도 녹인다 95
23. 적함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나날 97
24. 소대에서의 마지막 식사 103
25. 분노조절장애 109
26. 해병대 트라우마 115
27. 도피처가 된 연극반 121
28. 수상 관상 사주 124
29. 위험한 술집 순례 127
30. 성경구절이 춤을 춘다 130
31. 총장 사퇴 주역 134
32. 긴급조치 복학생 백남기 141
33. 성공회 전국청년연합회 회장당선 156
34. 하느님이 날 데려갈 모양이다 163

2부 교회 개혁 이야기

35. 대한성공회 신학대학원 입학 181
36. 신학원 동기 이춘기 189
37. 서대문 경찰서 탐방 197
38.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다 210
39. 콘트랄데이타 사건 224
40. 일본에서-1 233
41 일본에서 ?2 245
42. 일본에서-3 254
43. 주교님의 조찬기도회 참석을 막아라 266
44. 어차피 지는 싸움 278
45. 동생 경희의 신학교 입학 288
46. 사제들의 교회개혁운동 가담 293
47. 몸도 마음도 지치고 306
48. 주님의 음성 315
49. 고해성사는 예수원에서 320
50. 이현주 목사님의 공존모임 329
51. 책도둑놈 337
52. 마지막 인사 351
53.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떠나간 친구 360

에필로그 372
추천사 375

저자소개

김경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54년 부산출생. 중앙대 법대 졸. 중앙대 신문학과 대학원 수료. 성공회 신학원을 졸업하고 10년 만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광주에서 13년간 사목하고 2019년 10월 12일 정년 은퇴했다. 자서전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_약속’을 2019년 3월 20일 출간했다.
펼치기

책속에서

프롤로그

2016년 3월 28일 해군참모총장에게서 전자우편으로 법원에서 우리 교회로 소장이 날아왔다. 많은 평화운동가들과 시민운동단체들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생명평화결사’의 임원을 맡고 있던 나와 내가 속한 단체에 대해서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970년대 하반기에 해병대 졸병으로 제대한 나에게 해군참모총장이 소송의 원고로서 법적으로 말을 걸어온 셈이다. 생명평화운동조직이 ‘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선동하고 방조한 혐의로 피고가 되었다.
이런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해군과는 이상하게 악인연이라는 생각이 들며 내 몸 어딘가에서 부터 활화산의 용암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군대 트라우마의 악몽 때문에 청춘의 기억에서 지우려고 몸부림쳤던 해병대 시절의 40여 년 전 과거가 다시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다. 해군참모총장의 손해배상소송으로 말미암아 입대 명령을 받고 입영한 신병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다시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갇힌 셈이 되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당시의 끔찍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되는 모험을 치루더라도 정면돌파의 방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일상생활 속에 출몰하는 고질병인 군대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 치유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당시의 일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8개월에 불과했던 해병대생활을 페이스북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느낀 놀라운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옛날의 기억들이 여전히 나를 뿌리에서부터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까지도 군대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자유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가로부터 제대명령은 받았으나 여전히 재입대 명령의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핑계라고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인 언행과 행동 생활패턴은 상당부분 군대생활에 기인한 것이다.

해병대 이야기의 페이스북 연재를 끝내고 나는 자연스럽게 1982년 3월에 신학원에서 만난 내 친구 ‘이춘기’를 기억에서 다시 불러내게 되었다. 같이 살 때는 잘 몰랐지만 그 역시 군대트라우마에 갇힌 채 그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춘기는 광주 상무대에서 병으로 군대생활을 하면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총을 들고 시민들과 대치하면서 직접 몸으로 겪었다. 공수부대에 밀려 쫒긴 시민군들이 도망쳐 모여 있던 조선대 뒷산에서 총에 맞아 죽은 시민군들의 시체 나르는 일을 하며 그는 심한 정신적 내상을 입었다. 소속 군대도 달랐고 겪은 상황과 체험도 달랐지만 동병상련의 관계였던 것이다.
비록 40여 년 전의 옛이야기지만 신학원 동기로 함께 생활한 친구 이춘기와의 이야기를 해병대 이야기 다음으로 이어 쓰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서 나의 깊은 병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고 또 치유의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이 글은 나의 깊은 내면에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서 매번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격려와 결단의 용기를 주고 있는 내 친구 춘기에게 바치는 글이다.


에필로그

1984년 12월 17일.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맹렬하게 타는 불이면서 동시에 섬광이 번쩍이는 칼로 존재했던 춘기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이 세상을 떠버렸다. 헤어질 때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나자’던 춘기가 시체로 누워 있는 그 방안! 춘기 부모님과 누나와 친구들이 모두 모여 황망함과 서러운 울음으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나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춘기야. 너 같은 놈이 우리 곁에 살아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록해 이 세상에 남겨주마.’라고. 당시 그 누구도 나의 이 약속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나는 그 약속을 4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지킨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올곧았던 춘기! 피칠갑을 한 민중들이 온몸으로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 끔찍한 죽음을 가슴에 새기고 일상으로 돌아온 춘기의 역사 앞에서의 몸부림은 우리마저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자기 개인은 물론 그 어떤 것도 다 무시하고 오직 대의만 생각했던 춘기를 기억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었던 우리는 그의 교회갱신에 대한 불붙는 열정과 뜻을 기리고자 우리가 사제가 되기도 전 떠돌이 생활을 할 때부터 매년 추모미사를 드려왔다. 생때같은 녀석이 한이 맺혀 죽은 탓인지 이상하게도 춘기의 기일에 모이기만 하면 우리는 악령에 휘둘리듯 매번 크게 싸웠다. 20주기가 되었을 때 추모미사를 더 이상 드리지 말자고 어려운 결정을 하기도 했다. 10년을 쉬었다. 그러다 30주기부터 다시 모여 추모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교단내부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큰 부정이 연이어 터지면서 서울교구 주교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직무정지를 당해 중도하차하는 충격적인 상황이 왔다. 사제들과 교우들은 교회의 자정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사제와 평신도들이 좀 더 깨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 탓만 할 게 아니었다. 결국 문제가 된 주교도 우리 교회 안에 있던 우리가 배출한 우리들 중의 하나다. ‘주교의 교회’에서 주교가 주교노릇을 잘 해 낼 수 있도록 주교를 잘 모시고 넘어지지 않게 지탱하는 존재도 실은 사제와 평신도들이다. 교회가 이렇게 어려워진 책임은 사제인 나에게도 있다. 좀 더 잘못되기 전에 직언도 하고 저항도 할 만큼 했어야 했다. 정의감이 가장 강한 나이의 피 끓는 젊은 신학생들과 신학원생들 조차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못하는 이 답답한 현실이 나이 먹은 우리 세대의 책임임을 부인할 순 없다. 무엇보다 평신도들은 이미 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건 아닌지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그 옛날 80년대 초 신학원 시절의 ‘이춘기’란 존재를 다시 역사 앞에 불러내게 되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 글은 80년 대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하에서 교회가 민주화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20대 교회젊은이들에 관한 기록이자 교회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많이 소멸된 이 시대를 향해 길게 쓴 성명서이자 사죄문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기록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역사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 교회의 전반적 현실을 보면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가기는커녕 한국사회에서 지탄을 받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기독교의 본질을 뿌리 채 잃어버리고 민중의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금의 현실을 기록으로 꼭 남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역사에서 또 다시 같은 시행착오를 범하는 우를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후세를 위해서, 또한 아직 미련이 남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라고 믿는다.

부언. 첫째, 해군참모총장의 제소에 의해 제기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손해배상재판은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의 조정으로 별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둘째, 나의 해병대 이야기에 등장하는 계급이 대령이었던 연평도 부대장은 결국 비리가 드러나서 별을 달지 못하고 이병으로 불명예제대를 했다고 들었다. 아무 반찬 없이 간장에 밥을 비벼먹으면 밥이 목구멍을 타고 도로 넘어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 준 그 부대장이다. 10년 전 동창모임에서 만난 법대 동기가 내가 제대한 직후 해병대 장교로 연평도에 들어가 근무하면서 그 사실을 목격했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