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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7176111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1-06-17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하나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창백한 피부와 반항적으로 짧게 자른 머리칼, 렌즈 건너편이 비치질 않는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정장, 단추들을 따라 간소한 장식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여자를 하나는 잠시 얼어붙은 채, 영화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배우와 마주한 듯이 바라보았다. 여자의 오른손엔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가 손에 쥐어져 있었고, 보험회사 직원이라면 결단코 신지 않을 색상의 스타킹에는 커다랗게 올이 풀린 자국이 훤했다. 하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자리를 안내했다. 여자는 그의 말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잠시 서 있다가 겨우 안쪽으로 걸어왔다. 하나 앞을 지나는 그녀에게서 세탁하지 않은 교복을 입고 온 여학생처럼 쾨쾨한 냄새가 일순 스쳐 지나갔다. 그것만이 묘하게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혼자 일하나요?」그녀가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사무실을 찾은 손님의 물음이었다. 하나는 그녀에게 상진이란 창업자이자 동업자를, 사무실에 박혀 컴퓨터 만지길 혐오하고 최신형 삼소나이트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시내를 활보하는 청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다른 직원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그렇군요」그녀는 벌써 질문의 요지를 잊은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자 하나는 맞은편 서재 중간에 커피 드리퍼와 서버가 그대로 놓여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는 그것이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정물처럼 보이길 기대하며, 얼른 말을 돌렸다.「어떻게 오셨나요?」여자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테이블로 들어올렸다. 꽤나 무거웠기 때문에 하나가 도와야했다. 한파가 누그러졌대도 저것을 끌고 서울을 헤매는 건 어지간한 고생이리라… 지퍼를 열어 캐리어를 개봉하자 그 안엔 별도의 케이스 없는 브이에이치에스 테이프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족히 오십 개는 넘는 것 같았다. 하나는 테이프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개중엔 곰팡이가 하얗게 핀 것도 있었다.「큰 것은 육십이 개, 작은 것은 십오 개에요」큰 것, 작은 것. 그녀는 브이에이치에스 테이프와 디비 육미리 테이프를 간단히 구분하고 있었다.「테이프를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서요.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이곳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하던데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결혼사진의 색 보정에 매진하고 있던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무실이 미디어 복원 작업을 겸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인터넷 광고를 올린 건 한참 전의 일이었다. 장롱 속이나 수납장 깊숙이 잠들어 있던 비디오와 사진의 상태를 개량하고,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주는 작업은 개업 초기 쏠쏠한 수요가 있었다. 둘이 공공기관의 용역 계약에 매진한 이후로 복원 작업은 확연히 줄어들었다.「이걸 다 복원하실 건가요?」하고 하나가 말했다.「네」하고 여자가 말했다.하나는 잠시 계산을 해보았다. 지금부터 복원에만 매달린다 하더라도 족히 한 달은 걸릴 분량이었다.「가능할까요?」여자의 물음에 하나는 장난스럽게, 난처하단 듯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얼마나요?」「아마 한 달… 빨라야 삼주 후입니다」「더 빨리는 안 될까요?」여자는 다급해 보였다. 하나는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기며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한 달 안에 앨범 편집과 복원 작업을 동시에 끝낸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사무실에 브이에이치에스와 디비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데크가 몇 개더라? 한 개는 고장 났으니 카메라를 직접 컴퓨터에 연결하고 캡쳐를 받는다고 하면 동시에 테이프 두 개를 돌릴 수 있다. 다른 업체에서 데크를 빌려온다손 치더라도 제어할 수 있는 인력이 하나 혼자니 속도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하나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확실히 안 될 일은 아니었다.
「춥지 않아? 히터 틀까?」
남자가 물었다.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나 싶더니 어느 사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입 언저리에서 부서지고, 다시 날아들길 반복했다.
「괜찮아요. 엥꼬라도 나면 어떡해요. 이 근방에 주유소가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데」
여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티내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남자는 설마, 하고 웃었지만 기름 잔량이 바닥에 근접했음을 기억해냈다. 그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문 수납공간에 꽂아두었던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연락 두절, 보스, 지방 국도… 이러쿵저러쿵 고민한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유를 지키는 게 낫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선배, 젤리 먹을래요?」
「응? 하나만」
복잡다단한 보고서를 이리저리 넘겨보던 남자는 클립에 끼워져 있던 사진을 꺼내 김이 서린 전방의 유리창에 갖다 댔다. 필름 광택지의 매끈매끈한 뒷면이 물기에 찰싹 붙었다.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쓴 중늙은이 사내가 티 테이블에 얼굴을 맞대고 눈을 감고 있는 사진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사진을 보았다. 남자는 계속 사진을 붙였다. 카페에서 습격을 당한 것처럼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외국인, 피아노 건반 위에 엎드려 있는 귀부인, 거리 한복판에서 두 손을 배 위에 포개어 눈을 감고 있는 젊은이, 트럭 운전석에 고개를 뒤로 꺾고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남자, 중환자실에 고요히 누워 있는 환자까지.
「어떻게 생각해?」 하고 남자가 말했다.
「모두 눈을 감고 있군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역시」
남자는 만족스러워 하며 차가운 두 손을 맞비볐다.
「또?」
여자는 지긋이 사진을 보았다.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요. 모두 깨끗하군요」
「죽었다고는 안 했어」
「살아있다고도 안 했고요」
「너를 시험할 생각은 없어. 그냥 의견이 궁금할 뿐이야」
「선배는 이 사진들의 출처를 다 알고 있겠죠?」
「전부는 아니야」
남자는 아무래도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주의 깊게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길쭉한 바 테이블 주변으로 아무렇게 쓰러진 세 명의 청년들이 찍힌 사진을 가리키며 여자가 말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들, 같은 제복이에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란-이라크 전쟁 무렵의 이란 정규군 같은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정규군으로 급히 편성된 혁명수비대라 해야겠지만」
여자는 계속 사진들을 분석해 나갔다. 이번엔 피아노 건반 위에 쓰러진 귀부인의 흑백 사진이었다.
「피아노 뒤편으로 보이는 벽난로 위의 정물들 보여요? 포커스가 맞지 않아 다소 뿌옇긴 하지만… 집 주인이 벼룩시장에서 아무거나 사 모으는 수집광이 아니라면 집 주인은 아마 옛 소련의 당원임이 분명해요. 붉은 별 위에 교차된 낫과 망치가 장식된 메달 보이죠? 이건 천구백이십 년에 있었던 이차 코민테른 대회 때 당에 헌신한 간부에게 수여된 기념 메달이에요. 트로피도 있고, 스탈린이 서명한 문서도 보이네요. 하지만 사진 속의 여자가 당원 같지는 않아요. 아마 간부의 딸이거나 가족이겠죠. 피아노 위에 있는 곰 인형은 미샤라고 모스크바 올림픽의 마스코트인데, 모스크바 올림픽은 천구백팔십 년에 개최되었으니 코민테른 시기와 맞지가 않죠」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는데」
「얼마 전에 잠이 안 와서 러시아 혁명사를 알아봤거든요」
남자는 감탄했다는 듯 사진을 다시 관찰했다.
「난 톨스토이와 서신을 교환하던 러시아 귀부인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엔」
여자가 정리했다.
「아무 개연성 없이 모아놓은 돌연사 시신들의 사진 같군요. 시간이나 배경도 크게 동떨어져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일관적인 것도 아녜요」
「돌연사라면 자연사를 말하는 거지?」
「네. 책상 서랍으로 들어가 타임머신으로 이곳저곳을 오갈 수 있는 연쇄살인마가 있는 게 아니라면요」
빗방울은 계속 차 지붕 위를 건반처럼 쳐대고 있었다.
「제프 버클리라는 가수가 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그는 호수에 빠져 죽었는데 말이야, 그때 난 고등학생이었거든. 하지만 도무지 그가 익사했다고 믿겨지지가 않았어」
「그럼요?」
「다만 아직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선배가 가면 그때서야 나오고요?」
「그래. 정말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지. 지금도 조금 그런 면이 있지만」
조금? 하고 여자는 피식 웃었다. 제프 버클리가 빠진 건 호수가 아니라 멤피스의 강이며 시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단 사실을, 여자는 구태여 남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 역시 고등학교 시절 제프 버클리의 노래를 아껴들었던 것이다.
「돌연사란 표현을 썼는데」 하고 남자가 말했다. 「정확해. 이 사건들을 맡은 경찰이나 신문기자들도 온갖 낭설 끝에 똑같은 결론을 내렸지. 자네 말대로 이 사진들은 돌연사 사례들을 늘여놓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서 어떤 가설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맥락을 유추해보려고 해」
처음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하지만 하나가 딛고 있는 땅에선 조금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일시적인 현기증이라고 넘겨짚는 순간, 하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걸 보았다. 은유가 아니었다. 마치 대륙이라도 떨어지는 것 마냥 구름이 육중하게 추락하더니 다음은 조각난 하늘의 일부가 접착력이 다한 타일처럼 후두둑 붕괴하기 시작했다. 멀리 고가도로와 아파트가 한쪽으로 기우뚱 쏠리더니 급기야 삼십이 배속 느린 화면처럼 서서히 쓰러졌다.
서둘러 언덕을 내려오던 하나는 벽돌 주택 테라스에서 옷들을 팡팡 털고 건조대에 널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주부의 옷차림을 한 하나였다. 자전거를 탄 사람, 평상 위의 노인, 꼬마 아이들,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섬뜩한 풍경이었다. 고적한 일요일의 동네는 이제 범우주적인 공포로 얼룩지고 있었다. 하나는 주택가를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올라왔던 방향 반대편으로 내려가자 지상철의 노선에 따라 철로가 이어져 있고, 그 아래로 조그맣게 뚫린 굴다리가 나왔다. 하나는 그곳을 알고 있었다. 노란 등이 매달려 있고 하수구라 해도 믿을 만큼 지저분한 굴다리는 석관동의 신이문역과 재래시장을 잇는 연결 통로였다. 하나가 헤매는 이곳은 석관동과 도시의 모습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었다. 두 개의 꿈이 직조(織造)된 풍경에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하나는 불길한 기분을 억누른 채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철망 아래에서 늬랗고 침침한 빛을 발하는 백열등, 더러운 타일, 웅덩이,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는 천장… 하나가 기억하는 굴다리 그대로였다. 그런데 굴다리의 구간은 실제보다 훨씬 길었다. 석관동에선 지나치는데 삼십 초면 충분했건만, 지금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빛도 점점 탁해졌고, 길도 확연히 좁아졌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비집고 나오듯이 하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맞은편의 빛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을 가까스로 빠져나왔을 때, 하나 앞으로 펼쳐진 것은 석관동 재래시장이 아니라 바닷가였다. 텅 빈 해변에 파도가 연신 철썩였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에 하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휘익, 하니 불자 모래사장 위로 잿빛 그늘이 졌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파고도 높아졌다. 태풍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