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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7648960
· 쪽수 : 124쪽
· 출판일 : 2022-01-25
목차
제1부
수면하水面下의 피리
모래
고약
송아지
별
그림자
이마
수면하水面下의 피리
다인茶人
웅변 1
웅변 2
웅변 3
안개
무제
탱자나무 달밤
바이올린
굴뚝
제2부
사말四末, 그것이 오는 긴 순간
내 학동學童때의 야자수椰子樹 음미
사말四末, 그것이 오는 긴 순간
사제송司祭頌
한 달
아기송頌
기침, 눈과 바람과 비
상식적常識的인 것들
시린 부활
발언
한산도
나락奈落의 시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제3부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신시해설新市解說
여름 훈련
연잎의 물무늬
버스로 달리면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화선花扇에게
10월 19일, 의상대義湘臺
컷, YOON OO장
설악동雪岳洞 여사旅舍
기차汽車 및 바다
제4부
산에 가서
성벽城壁에 어리다
山에 가서
눈썹 소묘
꽃물
교외채전郊外菜田
무당집 앞에
해설
저자소개
책속에서
1.
들머리
나는 1971년 등단 6년 차 되던 해에 발간했던 시집 『연기 및 일기』(현대시학 제작)를 도서출판 《실천》의 기획시선으로 재출간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첫 시집은 시인에게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기념시집인 것이 사실이다. 이 첫 시집 속에는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산에 가서>와 1966년 제5회 공보부 신인예술상 특상 수상작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가 포함되어있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문학 인생의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1965년과 1966년은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고, 그 두 작품의 간격은 1년이었지만 작품의 특질은 극에서 극이었다. 전자는 정통 서정시이고 후자는 슈르나 다다에 가까운 전위 시 성격이었다. 나로서는 1966년 신인예술상 응모작으로 쓸 때 반 서정, 반 전통에 기반한 실험 시 지향으로 하는 데다 초점을 잡고 작품을 썼는데 놀랍게도 두 개의 관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장르별 심사에서 수석 상을 받고 전 장르 통합 심사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특상>이 된 것이다. 후일담인데 심사를 한 김현승 시인은 “「산에 가서」를 쓴 시인이 「연기 및 일기」를 썼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산에 가서」 자체도 여늬 서정시와는 다른 완결성이 있었는데 이 「연기 및 일기」의 자유자재한 이미지와 심층 심리의 표현적 진가는 절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부터 발표작들은 자동기슬이거나 잠재의식 길어올리기에 재미를 붙인 것들이었다.
「연기 및 일기」를 전후한 시편들을 두고 볼 때 동국대학교 학내 지근거리에 있던 시인은 송혁(동국대신문 주간), 문정희, 정의홍, 송유하, 선원빈 등이었고 작품으로 눈여겨 봐준 평론가와 시인은 서정주, 김상옥, 전봉건, 김춘수, 김장호, 김 현, 이동주, 강 민, 이승훈, 김영태, 이근배, 이성부, 조태일, 강태열, 이상범, 박이도, 장윤우, 문효치(군 입대), 홍신선, 호영송, 박제천 홍희표, 하덕조, 양왕용, 손진은, 정해문, 배달순, 강동주, 조정남 등이었고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은 눈치를 보인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들은 비교적 사조에 어둡고 시적 시야가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언 첫 시집을 낸지 5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대학원에서 시문학사의 60년대 강의를 할 때 더러는 학생들이 「연기 및 일기」를 가지고 분석한 자료를 내놓기도 했고, 더러는 세미나 때 한국시 6.70년대에 이르면 이 시집을 가려내는 순발력 있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첫 시집이 시 일생의 거점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젖게 되었지만 정작 그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정색으로 읽어보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경남문학관 특별전시에 <내가 읽은 시 한 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박우담 시인이 시집에 실린 「모래」(현대문학 게재)를 적어 내었다.
긴 강이 내의를 들고
간다 이 행동.
내 나라의 여름이 들끓고
기다리고 사라져 가고
조금씩 빠지는 살이 단단하게
여문다 기러기의 배 뒤집으며
철근의 긴 건축의
도보, 오 도보는 허탈하게
시작된다 너와 나와 너와 나와
경제의 풀잎에 이슬을
따며 나의 머슴,
저 들끓는 힘을 켜는 불아
_ 「모래」 부분
이 시를 전시한 뒤의 후일담이 들리지 않는다. 모래를 씹는 것 같다거나 어째 이런 시가 전시 대상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거나 하는 코멘트가 없는, 메아리 없는 시 지나가기일 뿐이었다. 이후 주변에는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를 재발간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1971년 간행했던 시집을 반세기를 지나 ‘다시 읽기’ 자리에 놓아보자는 것이다. 계간 《시와편견》 발행인 이어산 시인이 그 중심에 서서 내게 첫 시집 작품들을 컴퓨터에 올리는 일부터 시작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생각해 보니 시사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50년 이쪽저쪽의 시편들을 비교 독해하는 텍스트로도 유용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고 다시 시집의 체재를 검토하게 되었다. 1970년 전후 편집이 세로 판 짜기인데 이를 가로 판 짜기로 바꾸고 한자도 많이 들어가 있어서 당시의 감성을 살리기 위해 그때의 한문을 병기倂記하였다. 이만큼 50여 년의 세월에서 시집 체재가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산 시인의 발간 기획에 감사하다는 표현도 생략한 채로 나는 첫 시집에서 들어있지 않은 비평을 ‘자작시 해설’로 써서 독자와의 거리감을 좁혀볼까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기다리는 첫 시집 속으로 들어가 20대의 청춘시에 몰입했다. 아직 답사하지 못한 미개지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감성, 리듬, 감각어 등과 이미지군에 빠져들었다.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드리워졌다. 알겠다, 그런 상황이었지 하며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듯이 희희낙락하였다. 시 전체 44편 중에서 6편이 서정시이고, 38편이 나로서는 새롭게 시도한 것인데 이 38편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2.
나의 시는 ‘무목적시無目的詩’다.
목적이 없는 시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기존 시의 형식이나 관념을 깬다는 것, 해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해진 ‘룰’을 거부하는 시를 말하는 것이므로 ‘비대상’이나 ‘무의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목적에 반한다는 개념에서 보면 순수시 의미와도 같이 간다. 기존의 ‘룰’에는 어떤 비정형의 형식이나 주제도 포함하지만, 리듬이나 불연속적 이미지는 살려 놓고 있다.
정든 님아
질근 질근한 님아 이빨에
고약이 붙는다
웃지 마라 귀머거리 뒤에
장님이 거듭 지난다 대패는
도보로 꼿꼿이 지나며
웃지 않아 님아
수풀이 꼿꼿이 서게
껍데기를 지난다 시무룩히
시무룩히 님아
입술에 고약이 지나 한빔
고약을 빨아 송충이도 한
켠에서 고약을 빨아
정든 님아 너의 머리
위에 소리가 지난다
고웁게 저 대패의 자리
자리마다 소리가 지나며
보라 님아
움퍽한 눈을 파버린다 파버린다
_ 「고약」 전문
따옴시의 제목 ‘고약’은 무목적의 제목이다. 어떤 뜻이 담겨 있지 않다. 시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맥이 잡히지 않는다. “정든 님아, 님아”라고 부르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 “이빨에 고약이 붙는다”나 갑자기 대패가 나온다거나 수풀이 나온다거나 송충이가 나오는 것이 각기 필연성이 없다. 다만 고약이 붙어야 한다는 것, 대패가 지날 때 소리가 난다는 것은 실제 상황의 어떤 근거가 되지만 맥으로 이어지는 데는 역부족이다. 그럼 이 시는 무엇인가? 정든 님 앞에서 님을 부르고 있지만, 상황은 안개와 같이 오리무중이다. 엉뚱한 것끼리의 결합에서 오는 당돌함 같은 이미지, 불연속의 이미지가 스치고 있을 뿐이다.
깊은 오뇌가 뽑은
대롱
한 번 죽었다가 떠 오는 대롱
나도 피리
멈춘 손마디에 있다 잠수부에게
물 먹은 잠수부에게 들어낸 피리
구멍은 갈기 갈기 물
먹히고 갈대 꼿꼿이 송장이다
꽃이다 닮아 있는 물밑
살이 뽑은 고래
오 뛰어가 대밭에서 논다
대밭에서 죽은 나도 고래일 뿐
물밑은 기침이다 자라나는
대밭이다 오 구멍이 난
대롱이 떠오는
_ 「수면하의 피리」 전문
이 시의 ‘수면하’는 물밑이다. 수면水面 아래下는 무의식이다. 수면 위는 의식의 세계이다. 이 시는 화자의 무의식에 떠도는 피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첫 연에서 ‘깊은 오뇌’ ‘한 번 죽었다가’는 무의식이다. 거기 대롱이 떠오르는데 대롱은 피리이다. 어느새 “나도 피리”라 하고 나 또한 ‘잠수부’가 된다. 그 속에는 고래가 있는데 ‘살이 뽑은 고래’이다. ‘살’은 물살로 읽힌다. 그 속도로 대밭으로 가서 논다는 것이다. ‘피리 – 대롱 – 대밭‘은 같은 계열 이미지이다. 또한 그 속에서는 나도 고래가 된다는 것이다. 물밑은 하찮은 기침이고 대밭이고 구멍이 난 대롱이다. 인간은 무의식에서 피리로 소리를 내는 구멍이다. 고래이다. 이미지는 이리 저리 산만하게 놓이고 물밑은 혼돈이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무의식 세계에 대한 시적 접근을 보인 것이다. 어쩌면 시론적 시로 읽을 수 있겠다.
3.
시는 리듬과 비유적 이미지가 뼈대이다.
시 「굴뚝」을 자세히 읽어보기로 한다. 시가 갖는 최소한의 무장은 리듬과 비유적 이미지 인자이다.
은은히 내 손톱들
거느리고 피는
모락 모락 마른다 저 어둠의
장고를 메고 도깨비 두서너
마리
비틀대며 우쭐대며 내
살 안으로 들어선다 저 어둠의
눈살에 독오르는 마을의
옹기 종기 앞뒷집의
굴뚝이 부쩍 늘어나고 부쩍
용감히 긴 시간을 찌른다 저 어둠의
뱃집에 사는 긴 요충의
연설
은은히 또 요란히 구멍마다
부딪친다 저 꿈틀한 어둠의
모음이여
내 손톱의 깡마른 힘을
끓인다 피를 끓인다 삼천리
구멍 안에서
_ 「굴뚝」 전문
이 시가 가지는 창조적 리듬은 매 행이 3음보이거나 4음보 기본이다. 거기다 문장이 끝나지 않았으면서 행갈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 전에 보이지 않는 문장 조이기 기법이다. 이 시를 천천히 읽어내리면 어느 자리에서든 머뭇거려지거나 쓸데없이 리듬을 헝클리는 낱말이 없다. 매끈하게 흐르는 남자 바지의 주름을 볼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연의 다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 시기법의 특장이다. 앞 연 끝과 다음 연 시작 부분을 발췌해 본다.
어둠의
장고를 메고
어둠의//
눈살에
어둠의//
모음이여
연과 연 사이의 끊어서 이어지는 것은 시적 긴장의 한 측면이다. 그리고 비유적 이미지의 개별 단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둠의 장고를 메고” “어둠의 뱃집에 사는” “꿈틀한 어둠의 모음이여” “손톱의 깡마른 힘을 끓인다.” “삼천리 구멍” 등이 그것으로 이들은 하나의 맥락에서 작용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무목적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