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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경제경영 > 기업/경영자 스토리 > 국내 기업/경영자
· ISBN : 9791198260581
· 쪽수 : 258쪽
· 출판일 : 2024-10-25
책 소개
목차
■ 서문 6
제 1 부
1 삼성 비서실 전화 13
2 회장실 25
3 어두운 그림자 36
4 비운 42
5 공신의 배신 45
6 차남의 쿠데타 52
7 회장의 귀환 58
8 비운의 장남 62
9 고려빌딩 403호 65
10 가연 68
11 길지를 찾아 -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75
12 인재 92
13 입지 106
14 백설의 황금알 - 제일제당 백설표 설탕 111
15 제일모직 골덴택스 119
16 재벌 등극 129
제 2 부
17 시은의 대주주로 133
18 시련- 부정축재자 1호의 멍에 136
19 공직외도 - 경제인협회 초대회장 147
20 한일회담 이면지원 153
21 울산공업단지 조성 157
22 통화개혁과 삼성의 위기 160
23 이병철 회장의 충고 164
24 문화재단 설립 176
25 호암미술관 설립 182
26 중앙일보 창간 187
제 3 부
27 위암 수술 197
28 호텔신라 200
29 신세계 백화점 204
30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207
31 취미편력, 골프, 수집벽 213
32 삼성전자 탄생 221
33 꿈의 반도체 생산국 225
34 기업은 영원한가 232
35 이병철 회장 승계 결단 236
36 이건희 컬렉션 국가 기증 243
37 홍라희 여사의 선택 기로 249
38 이건희의 신경영, 철학이 되다 254
저자소개
책속에서
1
삼성 비서실 전화
변 기자가 출입처에서 오후 취재를 마치고 편집국 자리에 와보니 책상 위에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전화해달랍니다.’
‘삼성그룹 비서실장?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나. 최근에는 삼성에 별일 없지 않나.’
사카린밀수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한국비료도 국가에 헌납하고 모든 게 일단락됐는데, 변 기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비서실장이 전화를 바란다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변 기자는 2년여 전에 있었던 삼성그룹이 추진하는 전주제지 시설 도입 건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전주제지 건은 사실 크고 심각한 것이었다. 삼성그룹이 서독 크루프재벌로부터 국내최초로 제지 일관화 시설을 들여오는 프로젝트였다. 서독에서 산업시설이 차관 형식으로 들어오는 것도 최초였고 규모도 꽤 컸다. 서독 크루프재벌이 차관을 공여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크루프사는 4백 년 이상 철강 생산과 군수품 병기 제조로 유명했던 크루프 가문이 19세기 창업한 기업이다. 크루프는 거대 철강 기업으로 거의 1세기 동안 세계 철강 업계를 지배했으며 미국에서 철도 건설에 사용되는 강철을 생산하기도 했다. 1929년 당시 세계 최고층이라는 크라이슬러 빌딩의 최고층 부분도 크루프사 제품이었고 마리아나 해구 첫 탐사 당시 심해 수압을 이겨낸 잠수정도 크루프사 제품이었다. 철강과 무기 생산이 주인 크루프가 제지 시설까지 수출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변 기자의 출입처는 상공부였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취재차 들른 공업국 철강과에서 삼성재벌이 크루프로부터 제지일관화 시설 도입을 추진하는 프로젝트 서류를 보게 됐다. 변 기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취재를 하는 편이었다. 일과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 있기 때문에 한가한 점심시간이 효과적이었다. 변 기자는 프로젝트 내용, 특히 차관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결제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경제기획원과 협의하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상공부는 ‘제지 시설을 중고 시설로 도입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변 기자는 깜짝 놀랐다.
‘뭐! 새 시설을 중고시설로 들여온다…… 이건 범죄행위에 가깝지 않나. 외화도피. 새것 값을 주면서 중고품으로 위장하면 그 차액을 빼돌리겠다는 거 아닌가?’
한국은 외화부족으로 난리였다. 경제개발초기, 외화라면 눈이 벌게져 있었다. 외화도피를 반민족경제사범으로 규정해 엄벌하는 실정이었다. 국내 대재벌이 외자로 산업 시설을 도입하는 데 외화도피 방법을 쓰려 하고, 정부관계부처는 그런 행위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었다. 변 기자는 ‘이거 특종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완벽한 취재를 위해 계획을 세웠다.
‘우선, 시설을 도입하려는 행위 주체인 전주제지를 접촉해 보자.’
취재의 원칙이다. 변 기자는 전주제지 총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모든 회사의 총무과가 언론사 취재를 처리하는 때였다.
“여보세요, 일간신문기자인데 총무과 좀 부탁합니다.”
“총무과 누굴 찾으십니까?”
변 기자는 부장선이면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장님 좀 부탁합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잠시 후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저 총무부장 설진석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매일경제신문《현 매일경제》 변호기자입니다. 상공부 출입 기자실인데 전주제지 시설 도입 건에 대해 물어볼 말씀이 있어 전화했습니다.”
“전주제지 시설 도입에 대해서라고요? 무신 문제가 있습니까.”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는 밝았다.
“예, 몇 가지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결제 방법에 대해서입니다. 그게 새 시설을 중고로……”
설 부장은 변 기자 말을 끊었다.
“제가 변 기자님을 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화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좋을 대로 하십시오.”
“어데로 가면 됩니까.”
“상공부내에 있는 구내다방으로 오십시오.”상공부내 구내다방은 당시에 사실 도떼기시장 같은 곳이다. 무역업자들로 항상 시끌벅적하고 관리와 업자들이 만나 졸부, 속칭 ‘벼락부자’를 만들어내는 산실이기도 하다. 상공부 청사가 현재 광화문 교육보험 자리에 있었는데 제대로 된 정부종합청사가 없어 광화문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고 상공부 구내다방은 군용콘세트를 들여다 놓아 임시로 사용하고 있어 다방 같지 않다. 바닥은 판자를 깔아놓아 삐걱거리고 기름때가 묻어 새카맣다. 다방은 민원인들로 붐비고 특히 수입무역업자들이 많았다.
상공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입무역에서 그렇다. 모든 수입 상품은 수입쿼터제로 묶여 있어 상공부 상역국에서 외화(달러)를 배정해주는 한도 내에서만 수입이 허용되는 것이다. 수입무역업자에게는 사활의 명운이 달린 문제다. 외화쿼터를 얼마 받느냐는 것은 돈을 얼마 버느냐와 직결된다. 수입품의 국내 시장 가격은 대개 수입 가격의 5~6배, 품목에 따라서는 수십 배 높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그 차액만큼을 번다.
변 기자는 L회장과 만났다. 변 기자 소속사는 소공동 소재였고 L회장 회사도 인근이었다.
“변 기자, 다음 무역 계획에 소다회(양잿물) 쿼터가 얼마로 책정되는지 아시나.”
“그 품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기회 있으면 한번 알아봐 줄 수 없겠나.”
L회장 회사는 고체 세제 소다회를 독점 수입해 오고 있었으며 훗날 D화학이라는 거대 화학 산업체로 성장한다. 200kg들이 소다회 한 드럼을 수입하면 북촌에 좋은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할 정도의 이익이 나온다. 약삭빠른 업자들은 배정 받은 달러를 명동 뒷골목 암달러시장에 내다팔기도 한다. 암달러시장의 달러 값은 공정환율의 10배 높은 수준이다. 외화쿼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상공부 상역국의 진짜 위력은 무역 계획을 짤 때 특정 품목을 금수로 묶어 수입 금지시키는 것이다. 국내 생산업자들이 유치 단계에 있는 국내 산업 육성을 위해 아예 수입 창구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산업 분야의 생산 업자들은 금수보호막 속에서 독점 생산을 하게 된다. 이들이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고 낮은 값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정부의 3대 요직 국장으로 내무부 치안국장, 재무부 관제국장(현 국세청장), 상공부 상역국장이 거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론이 이들 세 국장을 요직으로 꼽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사하는 권한의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역국장의 전수입상품에 대한 외화(달러)배정권, 관제국장의 일제로부터 환수한 국유재산불하권, 치안국장의 경찰사찰권은 막강한 권력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관제국장의 국유재산불하권은 부의 판도를 바꿀 만큼 막강한 것이다.
일제로부터 환수한 국유재산으로는 부산의 조선방직, 조선견직, 전남의 전남방직, 수원의 선경직물, 삼척의 삼화제철이 핵심이다. 조선방직은 직원이 4천 명이 넘는 한국 내 최대 방직공장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대로 놓아두고 간 알짜기업이다. 이것을 불하 받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갑부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하재벌, 횡재기업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다.
대기업도 수입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항상 상공부 로비에 심혈을 쏟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은 당시 한성기업 부장 신분으로 상역국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성기업은 합섬 와이셔츠 수출업체로 필라멘트사(絲) 수입쿼터 배정에 사활이 걸려 있다. 삼성그룹도 제일제당의 원당, 제일모직의 원모 쿼터 배정을 위해 고위 간부가 상공부 구내다방을 이용했다.
*
전주제지 설 부장은 약속 시간에 맞춰 다방에 나타났다. 변 기자는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우선 우리나라 제지산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설 부장은 먼저 입을 열고 삼성그룹이 제지산업을 일으키려 하는 취지와 배경에 대해서 꽤나 긴 설명을 이어나갔다.
설 부장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제지산업은 고려 말 저화라는 지폐부터 시작한다. 공양왕 때 동전이 부족해 종이로 된 저화를 발행했으며 이조시대로 들어 조지서를 두어 관리를 배치하고 종이 만드는 것을 조정 전매 사업으로 했다. 태종은 서울 창의문 밖 장의사동(현재의 세검정)에 관리를 파견해 두고 조정에 필요한 질 좋은 종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도록 했다. 특히 조정은 중국과 왕복하는 문서에 사용되는 종이를 만들도록 했다. 이를 담당하는 관리를 사지라 하는데 그 유명한 사림 조광조도 사지직부터 관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제지산업은 이처럼 조정에서 운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제지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이마저 1882년(고종19)에 폐지되었다.
“기자님,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종이 소비량과 비례합니다. 제지산업은 중요합니다. 특히 언론과는 불가분의 관계죠. 신문 용지가 없으면 신문을 어떻게 찍습니까. 이웃 일본의 종이 소비량은 세계 3위입니다. 일본은 가히 읽는 국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국민 연간독서량도 세계 최고입니다. 이건 다 좋은 종이공장을 갖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변 기자님, 종이에 대해 좀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실은 종이의 힘이었습니다. 성서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1517년 엘베강변 비덴베르크대학 교회정문에 95조 반박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습니다만 초기에는 실패하는 듯 했습니다.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금 세공업자인 구덴베르크가 이보다 70년 전 종이에 새로운 인쇄술로 한쪽 줄이 42행으로 된 이른바 구텐베르크 성경을 대량 인쇄한 바 있는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대량 인쇄되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화 된 겁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훈민정음 해례본, 유네스코문화유산인 이조실록 등 종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귀중한 종이 문화를 가진 거지요.”
“흥미롭네요.”
“저희 그룹 총수 이병철 회장님은 항상 나라가 해방되고 어느 정도 나라꼴을 갖춘 후에도 반듯한 제지공장 하나 없어 국민들이 읽고 싶은 책도 많이 못 찍어내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온 겁니다. 언론계는 어떻습니까. 신문용지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심한 이야기지요.”
신문사는 일본산 신문용지를 신문인협회에서 배급받고 있었다. 정부에서 신문인협회에 신문용지 수입외화 쿼터를 정해주고 각사는 협회에 수요량을 요구하는, 각 사별로 배정해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건 언론 자유와 유관한 의미심장한 제도다. 만일 신문협회에서 각사가 요구하는 양을 제한하거나 배정에서 배제하면 그 신문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는 눈엣가시였다. 어떻게든 신문사 제작에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애를 쓰는데, 용지배급제야말로 가장 유용한 수단인 것이다. 신문협회 회장은 정부대변지 신문사 사장이 맡고 있었다. 정부대변지 신문사 사장이 협회회장을 맡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특히 정부 비판적 성향의 언론사들까지도 은근하게 친정부 신문사 사장을 협회장으로 미는 것이 언론계의 관행이었다. 정부와 용지수입쿼터 배정 협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그런 친정부인사를 고리로 언론사와 교섭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친정부 대변지 신문사 사장은 대통령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어떤 때는 혁명주체 세력 중 한 사람을 대변지 사장으로 내정하거나 정치적 비중이 큰 사람을 사장으로 정하기도 했다. 신문협회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조찬간담회를 연다. 각사 사장들은 빠짐없이 이 간담회에 참석한다. 참석율이 좋지 않으면 일단 친정부 성향이 아닌 것으로 찍히기 쉽다. 간담회는 조찬을 겸한 모임이지만 대부분 회장이 전하는 정부의 움직임이나 희망사항을 전달하는 그림이다. 회장은 은근히 비판적인 언론사에 대해 정부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으며 용지 배정량이 축소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부는 신문용지공급이 제한적인 것을 들어 모든 신문은 1일 12페이지 이상 발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언론자유이고 언론사는 무제한의 지면으로 사회 각 분야의 뉴스를 각사의 재량으로 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렇게 제작지면 총량을 제한하는 것은 후진국형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논리는 신문용지를 수입할 수 있는 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 아래서는 지면 제약이 있는 만큼 언론자유도 없다. 기사화할 필요가 있는 사안들이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언론계는 줄기차게 신문용지쿼터를 늘릴 것과 지면 제약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정부는 정부가 갖고 있는 가용외화 부족을 내세워 피해나갔다. 정부 비판적 성향의 신문사는 독자 폭증으로 정부 배정량으로는 늘어나는 독자 수요를 따라갈 수 없다. D일보는 하는 수없이 국산제지사의 신문용지를 구입해 쓰기도 했다. 국산 신문용지는 일본산에 비해 질이 형편없는데다 값은 3~4배나 고가였다. 설 부장은 국내제지산업의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이번 삼성그룹의 전주제지 설립 프로젝트는 언론계에도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주제지는 산업용지보다 신문용지라인을 충분히 마련해 국내신문용지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변 기자는 꽤나 큰 고민에 빠졌다. 신문용지난, 언론자유 위축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외화를 유출하는 변칙적인 결제 방법이 용인될 수 있느냐가 문제다. 변 기자는 설 부장에게 말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귀 그룹의 언론계를 위한 신문용지 생산 계획에는 찬성하지만 외화차액을 유출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변 기자님. 말씀 더 들어보이소. 현재 많은 산업 시설이 차관방식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대부분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산업 시설들이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수단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 기자님은 아직 재계를 잘 모르시는 겁니다. 외자도입의 경우 대부분 국내에서 집권당에 일정 비율로 리베이트를 주고 있습니다.”
“뭐요! 집권당에 리베이트를 준다고요?”
“그렇습니다. 좀 배경이 센 사람들은 총 도입 금액의 3~4%를 내면 되지만 약한 사람들은 6~7%까지 냅니다. 집권당도 그 정도 받아야 선거도 치루고 정치도 할 것 아니겠습니까.”
설 부장은 거침없이 외자도입에 따르는 정치권과 재계의 부적절 뒷거래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설 부장은 변 기자 얼굴을 흘금흘금 훔쳐봤다.
‘변 기자 이사람 과연 요리를 할 수 있을까’
변 기자가 아직 젊고 기자생활 연륜이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설 부장은 생각했다. ‘이런 신인들을 다루기가 오히려 쉽지 않단 말이야. 노련한 기자들은 말이 잘 통하는데.’
변 기자는 설 부장의 달변에 오히려 느끼한 어떤 것을 느낀다. 삼성그룹 부장급의 언변은 보통 이상인 것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자도입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정치권, 재계가 그런 방식의 거래를 하는 것은 언론의 시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국내 일류 재벌 삼성이 그렇다면 말입니다.”
변 기자는 단호히 말했다.
난감해진 설 부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기자님. 다른 각도로 생각해 주이소. 이 프로젝트는 언론계를 위한 겁니다.”
설 부장은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슬그머니 웃옷 속 호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들었다. 일반 편지봉투가 아니다. 사이즈가 좀 크고 파란색 속지가 들어있는 이중형 봉투다. 두툼해 보였다.
“기자님. 이건 제 성의입니다. 부회를 하거나 모임이 있을 때 쓰시라고 조금 마련한 겁니다.”
설 부장은 주저하지 않고 변 기자에게 건넸다.
“이거 뭡니까. 왜 이런 걸 주려 합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변 기자는 언성을 높였다. 변 기자는 티 테이블 위에 있는 봉투를 집어 들어 내팽개쳤다. 그 순간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신권 현금이 다방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새카만 다방 바닥에 돈다발은 부챗살처럼 흩어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놀랐고 설 부장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변 기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실로 돌아가 버렸다. 변 기자는 회사 부장의 말을 떠올렸다.
“옷은 처음부터 깨끗이 입어야 하고 사람의 이름은 젊은 시절부터 소중히 해야 한다.”
변 기자는 편집국으로 돌아와서도 전주제지 건으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언론자유와 부정한 외자도입,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때 변 기자에게 구내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 목소리가 굵고 우렁찼다.
“변 기자님이십니까. 저는 전주제지회 최 이삽니다. 퇴근하실 때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다.
전주제지 최 이사. 처음 듣는 이름이다. 소속이 전주제지라는 걸 보면 설 부장하고 관련이 있어 보인다. 퇴근을 위해 변 기자가 회사 정문에 다다르자 50대의 거한이 변 기자에게 다가섰다. 최 이사는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았으며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변 기자시죠. 저와 이야기 좀 하시지요.”
“무슨 이야깁니까.”
최 이사는 두말없이 변 기자 팔을 붙들고 거센 완력으로 변 기자를 검은색 코로나 승용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코로나는 고급 차로, 코로나를 자가용으로 가진 사람은 소수다.
“제가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변 기자는 기습적으로 승용차에 태워졌고 차가 멈춘 곳은 무교동의 오작교라는 요정이었다. 최 이사 안내로 들어선 방은 삼면이 병풍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보료가 깔려 있었다. 최 이사는 변 기자가 앉자마자 넙죽 큰절을 올렸다.
“저 최이삽니다. 인사 올립니다. 이렇게 갑자기 모신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변기자는 얼떨떨했다.
“전주제지 프로젝트 잘 봐주십시오. 한국제지산업 명운이 걸려 있고 언론계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최 이사는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술판을 벌였다. 최 이사는 죠니워커블랙라벨 병을 들고 계속 변 기자에게 술을 권했다. 변 기자가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변 기자 소속사는 석간이다. 아침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언론자유를 위해 그 정도는 이해해 주자. 재벌그룹의 로비에 넘어간 건 아니다.’
변 기자는 설 부장과 최 이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자 수첩에 적었다. 부장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