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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성경의 이해
· ISBN : 9791199780408
· 쪽수 : 212쪽
· 출판일 : 2026-03-31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1. 시작과 끝
2. 마르코 복음서의 결말 - 사라진 것인가, 열려 있는 것인가?
3. 마태오 복음서의 결말 - 위대한 사명
4. 루가의 매듭지어지지 않은 결말
5. 요한 복음서의 결말 - 끝과 시작들
나가며
모나 D. 후커 저서 목록
책속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란 늘 어렵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애쓰기 마련이니까요.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연, 소설, 수필이나 설교 등 어떤 글을 쓰든 ‘첫머리’를 떼는 일 자체가 도전입니다. 독자나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음 이야기를 더 듣거나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시작은 중요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눈으로 읽는 글보다 귀로 듣는 말에 의지했습니다. 책은 소리 내어 읽기 위해 쓰였고, 듣는 이들은 놓친 대목을 다시 확인하려고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스크롤바를 위로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자가 책을 시작할 때는 꼭 필요한 정보를 일러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또한 당시 책에는 오늘날처럼 책의 성격을 친절하게 알려 주는 번듯한 표지나 뒷면의 추천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이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첫머리에서부터 넌지시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책의 시작 부분에 글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반드시 남겨 두어야 했지요.
글을 시작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관례가 있습니다. 전래동화는 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만 듣고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곧바로 알아차리지요. 편지는 “친애하는”Dear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 연극도 ‘도입부’prologue로 막을 올렸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무대 위에서 펼쳐질 이야기를 관객이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지요. 이러한 정보는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는 때와 장소, 등장인물이 누구이며 서로 어떤 관계인지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더 깊은 의미를 짚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작가는 도입부를 통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가운데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힘은 신들의 정당한 요구일 수도 있고,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습니다)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관객과 나누고자 했습니다.
복음서들을 펼쳐 보면 우리는 이 책들이 하나같이 확실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열린 채 끝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딘가 불편하고 아쉬움을 느끼며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게 되지요. 이러한 특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마르코는 15장에서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분이 묻히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16장에 이르러서는 단 한 개의 짧은 문단으로 복음서를 서둘러 매듭짓지요. 몇몇 여인이 가서 비어 있는 예수의 무덤을 발견하고 “예수께서 살아나셨으니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어느 낯선 청년에게 들었다는 짤막한 보고 이후, 마르코의 이야기는 16장 8절에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립니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마르 16:8)
독자는 당혹스럽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이야기가 절반쯤 전해지다 끊긴 것 같기 때문이지요. 의문은 무엇 하나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남습니다. 대체 누가 무덤의 돌을 굴려 냈을까요? 흰옷을 입은 신비한 청년은 누구일까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그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을까요?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그분을 만났을까요? 무엇보다도 여인들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면 제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걸까요?
과장이든 아니든 요한의 이러한 언급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영광을 인간의 언어로 요약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가리킵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풍요로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려 하신다면 바다가 마른 땅으로 바뀐 온 세상이라 할지라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요한 복음서 21장의 마지막 문장은 더는 붓을 놀리지 않으려 궁색하게 내놓은 빈약한 결말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저자가 자신이 다루는 주제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그 거대함을 글귀로 온전히 담아내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두고 쓰일 책들을 온 우주가 다 담아낼 수 없다면, 이는 그분께서 다름 아닌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만물이 당신을 통해 지음받은 근원이시며(요한 1:3) 우리에게 하느님 당신의 본성을 친히 드러내 알리신 분입니다(요한 1:18). 이러한 바탕 위에서 보면 “바다가 마른 땅으로 바뀐 온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행하신 일들, 곧 하느님의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면모를 드러낸 활동의 자취를 온전히 담아낼 길은 없습니다. 예수에 관해 배워야 할 바는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보다 아득히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발견하고 깨닫기 위해 독자가 닻을 올린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