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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 ISBN : 9791199437609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25-09-03
책 소개
목차
감사의 말
1. 서론
2. 만물을 아우르는 이야기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놀라움 - ‘만물을 아우르는 이야기’의 기원
새 창조와 옛 창조, 그 둘이 함께 있는 시간에서 살아가기
십자가와 부활, 만물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형성하는 흐름
결과, 효과, 함의 -하나의 이야기와 그 외 이야기들
결론
3. 인간
나자렛 예수는 인간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이다
인간의 죄와 변화
죽음과 생명 - 우리의 미래는 무엇인가?
결론
4. 제도들
구조와 위계
교육
돌봄
결론
5. 결론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것 - 다시 익혀야 할 이야기
자율적 개인 - 벗기고 잊어버려야 할 이야기
놀라움
인물 색인 및 소개
책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다. 그리스도교는 기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대서양 서구 사회와 문화의 모든 층위에 깊이 스며들었다. 서구 역사라는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구조에서 그리스도교를 걷어 내면 전체가 와해될 것이다. 순수 예술이나 건축, 대중문화나 스포츠 스타, 지역 교회, 정치 논쟁, 지적 담론, 정책 결정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언어와 심상, 영향력, 유산은 넘쳐난다. 심지어 종교를 혐오하는 이들조차 종교를 공격하며 염두에 두는 것은 대개 그리스도교다(물론 그리스도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측면에서 우리는 틀렸다. 사실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지난 2~3세기 동안 강한 힘을 발휘한 사상의 흐름은 그리스도교가 인간과 세계를 이해했던 방식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한때는 함께하는 삶의 기반이 되었던) 삶의 습관들에서도 우리를 멀어지게 했다. 이제 성서의 하느님은 더는 인간 삶의 지평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을 원하는 바와 해야 하는 바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종교인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도덕 판단은 개인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며 교회는 여느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society와 다를 바 없다. 경제 현실은 일주일 중 특별한 날이었던 주일을 지워버렸다. 이러한 흐름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러한 변화가 오늘 우리 삶에 미친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본래 무엇인지를 망각했고, (여전히)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구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 너무나 익숙한 동시에 너무 멀어져 있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는 ‘처음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사라지는’ 순차적인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여기에 있으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익숙하나 동시에 그리스도교를 잊었다. 이는 이중적이면서 역설적인 하나의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 흐름은 매우 강력하며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 영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스며들어 신앙생활의 상당 부분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여전히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그 논의는 ‘정의’, ‘복음화’, 그 밖의 여러 주제처럼 이미 세속화된 특정 틀 안에서 이뤄진다. 그 결과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미 지지하는 대의명분에 초월적인 권위를 덧붙여 주는 부속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언어에 익숙하고, 자신이 중시하는 사안을 다룰 때 이를 자유롭게 활용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세상을 놀라게 했던 생명력 넘치는 성서와 교회 전통의 흐름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 언어는 그것을 낳았던 신앙의 세계가 아니라 이 시대가 만들어 낸 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그 틀 안에서 그리스도교 언어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고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새로운 놀라움과 갱신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는 가정 아래 성서에 바탕을 둔 상상력을 기르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뿌리내린 기대와 새로움을 빚어내는 생명력 있는 전통의 흐름도 익히지 못한다. 재발견이 불러올 수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그리스도교는 놀라움이었다. 누구도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등장한 뒤 빚어낸 많은 것에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워했다. 누구도 그리스도교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리스도교에 담긴 뜻과 힘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특히 로마인들)은 이를 없애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는 작은 유대교 분파에서 로마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내놓았다. 어떤 이론은 그럴듯하고, 어떤 이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이론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누구도 그러한 전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교가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자명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예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문에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전례 없는 일이었는지를 잊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한 사람, 나자렛 예수라는 한 유대인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관심을 집중한다는 데 있다. 이는 실로 광범위하고 복잡한 결과를 낳았으며 역사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 여파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많지만 왜 나자렛 예수라는 한 인물에게 이토록 집중하는 일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토록 놀라운 일인지를 이해하려면 일정한 틀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측면(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야기, 인간, 제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놀라움을 조명하려 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어느 하나도 나머지를 떼어 놓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저 세 요소가 함께 그려내는 하나의 큰 그림을 제시하는 데 있다. ---p.13~17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거듭 지적했듯 현대 사회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변화는 어떤 면에서 신앙의 핵심이었다. 부활의 능력은 곧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받아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 6:4)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이는 부활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다(이러한 면에서 현대인들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둘은 서로 맞물려 있어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도 함께 받아들여지고, 하나를 부정하면 다른 하나도 함께 무너진다). 변화는 개인의 사적인 삶뿐 아니라 그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 전반에 일어났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나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여겼고, 당연히 사회 전반에 퍼진 관행 중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스르는 구조나 관습에 저항해야 한다고 보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에 주목할 점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처럼 특정 사안에 ‘자신들의 대의’를 관철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로서든 개인으로서든 세상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운동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구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