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원본 노자 (큰글자)
양방웅 | 이서원
18,000원 | 20180219 | 9788997714995
1993년 죽간형태로 발굴된 초간본을 근간으로 한 노자
초간본楚簡本이 도덕경의 원본입니다.
동양철학계의 석학 김충열교수는 초간본이 출현하기 전에 통행본을 가지고 강의한 일에 대해서 학자로서 부끄럽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초간본楚簡本으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노자》는 오랜 세월 세계의 석학들이 탐독한 책입니다. 이를 톨스토이는 러시아어로 번역하였고,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독일어로 번역하였답니다. 하이데거는 “누가 탁류를 안정(安靜)시켜서 서서히 맑게 할 수 있을까? 누가 안정되어 있는 것을 움직여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초간본 제12장(통행본 제15장)의 두 구절을 한자로 써서 그의 서재 벽에 걸어놓고 보았다고 합니다. 신영복은 생애 중 소중하게 본 책으로 《노자》?《논어》?《자본론》 3권을 꼽았습니다.
노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옵니다. 에는 노자라는 이름으로 노담?노래자?태사담 3명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노자》는 누가 쓴 책일까요? 그리고 성(聖)?지(智)?인(仁)?의(義)?예(禮)에 관한 전통적 오행의 윤리이념을, 초간본과 《한비자》에서는 찬미하고 있는데 백서본과 통행본에서는 이를 반유가의 글자로 바꿔 노골적으로 유가를 배격한 이유는 뭘까요?
첫 번째 의문은 1973년에 호남성 마왕퇴 한묘에서 백서본이 출토되었고, 이어서 1993년에 호북성 곽점 초묘에서 초간본이 출토되면서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이 의문은 곽기(郭沂)등 초간본을 연구한 학자에 의해서 풀립니다.
『노담은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쳐 주었으며, (노담 또는 그의 제자가) 춘추 말 BC480년경에 초간본을 쓴 사람이다. 태사담은 공자가 죽고 100여년이 지난 BC374년에 진헌공을 찾아가 만났으며, BC380년경 전국 중엽에 초간본을 바탕으로 당시의 여러 학설을 종합하여 증보판 를 지어 윤희에게 준 사람이다. 그리고 노래자는 그의 저술이 아직 알려지지 않아 불분명한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초간본은 그 자체로 완정한 족본(足本 완전한 판본)입니다. 그리고 는 한비자가 《한비자》?편을 쓰기 위해 본 책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백서본과 통행본에서 전통적 윤리이념을 왜 배격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생겨난 진원지는 백서본(갑)에 있습니다. 그동안 학자들은 백서본과 통행본에 나오는 와 같은 글을 보고,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仁’의 개념을 편애(偏愛)?편사(偏私)라고 거꾸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노자를 반유가적 인물로 낙인찍었던 것입니다.
‘仁’이란 기본적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 즉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 입니다 《묵자》 . 仁의 개념은 이러한 애인(愛人)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천지만물이 공생(共生)하는 애물 (愛物) 그리고 애천(愛天)으로까지 더욱 확충해나갑니다. 仁의 본성은 청정(淸靜)입니다. 仁 하다고 스스로 나타내지 않고 그저 맑고 고요합니다. 치열하게 흘러가는 강물도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함과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仁의 성품을 지녔습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仁의 본성인 청정을 온전하게 찾습니다. 마치 차별 없이 만물에 비추어 따스한 기운을 베풀어주는 햇빛처럼, 바다도 특정한 사물을 편애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참된 仁은 바다나 햇빛을 닮아 과시하거나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大仁不仁.《장자》]. 소인(小人)들은 편애하고 과시하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未有小人而仁者也, 《논어》], 성인은 결코 편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여러 성인이 나와 인간사회를 좀 더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며, 천지 또한 묵묵히 만물을 낳아주고 길러주고 갈무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통행본 제3장의 불상현(不尙賢)이나 제19장의 절성기지(絶聖棄智)?절인기의(絶仁棄義)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튼 초간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다. 노자는 전통윤리를 중시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유가사상을 선도하였음이 초간본의 출토로 확인되었습니다.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은 서로 대립과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이 잘 이뤄진 관계에 있습니다.
《한비자》편 해설을 보면, 한비자 또한 전통윤리 개념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칭송하고 있지요. 한비자는 외적으로 엄정한 법치를 강조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전통윤리를 존중한 법가입니다. 군주는 통치를 위해서 ‘법(法:道?刑)과 덕(德:術)이라는 두 개의 칼자루[二柄]를 잡고, 철저히 공익公益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편에 나오는 “실도이후실덕(失道以后失德 도를 잃으면 다음에 덕도 잃는다)”이 백서본에서는 “실도이후덕(失道而后德 도를 잃은 다음에 덕이 나타난다)”으로 나옵니다. “失德”에서 ‘失’자를 빼고 “德”이라고 한 것이지요. 통행본 제38장에도 백서본과 같이 “실도이후덕(失道以后德)”으로 나옵니다.
김충열은 이를 해설하면서 인용한 편의 글 중에 “失자가 와서는 안 되는데, 한비자는 계속 失자를 쓰고 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일 게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失’자가 들어간 것을 착오로 본 것이지요. 이는 한비자가 와 를 쓰기위해 본 책을 “《백서본(갑)》”이라고 단정한 것에서 생긴 착각으로 봅니다. 한비자가 본 책은 입니다. 그리고 ‘失’자가 들어간 것은 착오가 아닙니다.
에서 친유가적 글 12개장을 뽑아 편을 지은 것이지요. 실도이후덕(失道而后德)과 같은 반유가적 글은, 《한비자》가 작성된 BC240년까지는, 《노자》라는 책에 들어있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왜 에 있는 친유가적인 글을 반유가적인 글로 바꾸었을까요?
혐의가 가장 짙은 사람은 진시황 때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입니다. 그가 『새 시대의 정책을 비판하는 낡은 사상을 지닌 유생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유가의 책들도 모두 불살라버려야 하며, 오로지 법치와 우민정책으로써 통치하여 군주의 권력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창한 글이 《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는 순자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한비자를 독살하고, 시황의 승인을 받아 분서갱유를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사의 언행으로 미루어보면 「백서본(갑)은 《한비자》를 작성한 BC240년 이후부터 분서갱유를 단행한 BC212년 전 사이에, 유가 등 지식인을 탄압하고 철권통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이사가 중에서 일부 글자를 교묘하게 바꾸기도 하고 끼어 넣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개작한 다음에 는 분서갱유 때 다른 책들과 함께 태워버렸겠지요. 그러나 그 흔적이 《한비자》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사가 를 개작한 것이 곧 백서본(갑)」이라고 봅니다. 백서본을 통행본과 비교해보면, 거의 같은 판본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道와 德에 관한 글의 순서가 바뀌어있을 뿐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별 것 아니다’라고 평가절하 했던 것입니다. 백서본은 그동안 노자사상을 왜곡시켜온 주범입니다. 현재로서는 이를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서본에서는 “道가 상실된 이후에 德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학자들은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무어라 설명하든 그건 《장자》에 나오는 도척(盜? 도적 수령)이 도가나 유가를 힐난하며 내뱉는 궤변일 뿐입니다.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강단에서 오래 동안 자신도 모르는 해괴한 논리로 노자강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김충열은 초간본이 출현하기 전에 통행본을 가지고 강의한 일에 대해서 학자로서 부끄럽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새로운 출토자료를 보지 못해 자기의 잘못된 학설을 고치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나는 살아서 그 잘못을 수정하고 미비했던 학설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는 ‘행복한 학자’라고 스스로 자위해 본다.”라고, 그의 책 머리말에 썼습니다. 양심을 지닌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국내의 《노자》관련 책 중에는, 초간본의 내용을 백서본이나 통행본과 비교하며 설명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간본을 전면적으로 해설한 책은 현재 양방웅의 《초간 노자》와 김충열의 《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 그리고 최재목의 《노자》 3종에 불과합니다.
필자가 2003년에 쓴 《초간 노자》와 2016년도판 《노자 왜 초간본인가》를 보완하여 다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