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기억, 냄새 (문학으로 본 후각의 문화사)
김성연 | 서해문집
23,400원 | 20251020 | 9791194413653
‘이야기만이 냄새를 설명할 수 있다’
근대 문학에서 찾아낸 후각 언어들의 향연
냄새에 관한 기억은 마음을 동반한다. 설렘, 황홀, 소중함, 그리움, 당황, 고통, 공포,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것. 이러한 냄새에 관한 경험은 좀처럼 수치화되거나 공식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냄새와 만나는 일은 순간의 경험이며, 사진도 영상도 그 경험을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아직 후각 경험의 의미에 관한 온전한 기록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법에 의존한다. 오직 언어로만 전달된다는 뜻이다.
인류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 매체인 ‘문자’만이 찰나의 감각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맥락을 기록해 왔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언어권에서는 ‘달다, 쓰다, 맵다, 짜다, 시다’와 같은 기본 미각어와 같은 기본 후각어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로, 오롯이 후각 의미를 지시하는 기본 후각어로 ‘구리다, 누리다, 비리다, 구수하다, 고소하다’ 등이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후각 경험을 이야기할 때 단도직입적으로 냄새의 진원지가 되는 사물을 지시하거나, 다른 감각 어휘를 빌려 오거나, 여러 비유를 동원하여 설명한다. 후각 언어는 ‘냄새 대상-냄새 특성-냄새 이름’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후각 언어는 그 지시 대상을 특정한 의미나 이미지와 결부하는 개념화 과정을 만들어 낸다. 향미가 그득한 와인이나 커피를 설명할 때조차 정작 향 그 자체를 지시하는 명료한 단어를 찾지 못하여, 혹은 한 단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관형사·명사·형용사를 동원해 기나긴 구문을 생성해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와인의 맛과 향을 매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소믈리에는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동원한다. 미각과 긴밀히 연관된 후각 경험을 재현할 때는 늘 서사에 의존해 왔다.
문자로 기록된
사라진 냄새, 낯선 냄새, 익숙해진 냄새 이야기
‘글’은 ‘인간에게 후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유일한 아카이브다. 지난 7년간 틈틈이 사라진 냄새, 낯선 냄새, 익숙해진 냄새의 기원과 흔적을 찾았다. 이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 시간, 공간, 존재 사이를 연결하거나 단절하며 시각성을 보완 혹은 전복하는 역할을 해 온 후각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근대 문학과 언론 매체는 관련한 여러 대목을 발견할 수 있는 보고(寶庫)였다. 근대화라는 변화의 냄새를 감지하는 흥미로운 장면들은 소설·시·수필에서도, 일간지의 기사와 광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선 변화의 도입부였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기록을 주로 보되, 해방 후 도시화가 가속화된 시기와 감수성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난 최근의 SF 장르도 일부 다루었다. 냄새는 실제 경험이나 수사적 의미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냄새의 본질이기도 하여 이들을 아울러 살펴보았다. 냄새와 이야기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 사이로, 우리를 ‘존재와 부재’ 사이로 연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력을 매개하는 ‘이야기’는 존재의 흔적인 냄새와 그렇게 연결된다.
또한 이 책에선 ‘향기’와 ‘악취’ 대신 ‘냄새’라는 중립적 단어를 선택하여, 우리 삶의 각 대목에서 그것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포괄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냄새는 과거와 현재, 공간과 사람, 이곳과 저곳, 사물과 우리, 나와 너를 매개한다. 냄새는 이들이 구체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기억될 수 있게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록된 후각적 언어들은 근대화의 속도나 방향성, 그 위용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했던 시각적 언어들과는 다른 후경을 제공했다. 후각적 언어는 보이는 것과 다르거나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말없이 가리키는 수줍은 제보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