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 경후 김단희,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딸)
정현숙 | 디자인나눔
0원 | 20210504 | 9788997595648
이 전시는 김단희의 두 번째 서전으로, 아버지 김충현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나이 51세 되던 1992년 첫 전시 “경후김단희서전”이 아버지의 작업실인 백악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니 30년 만에 같은 곳에서 열리는 전시다. 첫 전시는 딸로서 투병 중인 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자신이 공부한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 서전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영전에 바치는 전시다.
시서화를 생활의 일부로 여긴 여느 사대부가처럼 안동에 본을 두고 서울을 기반으로 조선 후기를 풍미한 안동김문 김단희의 집안은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 후손들은 집안의 경조사에 늘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서書는 그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리고 서에 뛰어난 이들은 선조들의 시문을 작품으로 남겼다.
이런 문예적 환경 속에서 생장했기에 후손 단희의 조상에 대한 자긍심과 고마움을 남달랐고, 자신의 붓으로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여러 사정으로 실행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어느덧 아버지 탄생 100년을 맞이하고 자신은 팔순이 되었다. 그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훌륭한 조상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조상의 얼을 드러내고 자신의 철학과 예술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커 근래에 틈틈이 해 온 작품들과 이전의 주요 작품들을 엮어 이 서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4부로 나눠진다.
1부는 ‘붓으로 기리는 선조의 문예정신’이다. 여기에서는 김단희의 15대조 김상헌, 증조부 김영한, 조부 김윤동, 부친 오형제 김문현·충현·창현·응현·정현, 사촌동생 김완희(김창현의 장녀), 매제인 시인 최연홍의 시문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그들의 숭고한 문예정신을 기리고자 했다.
증조부가 손자에게, 조부가 아들에게 쓴 글과 아버지 오형제가 부모님 회갑을 축하하는 글, 아버지가 숙부들 회갑에 쓴 글, 아버지가 지은 시와 글들이 후손 단희의 글씨를 통해 다시 살아나고, 둘째 숙부 김충현을 그리워 한 김완희, 처부모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듬뿍 담고 있는 최연홍의 아름다운 글들은 사촌언니와 처형 김단희의 붓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품격을 지닌 집안의 글과 김단희의 격조 있는 글씨가 일체되어 명문가의 고고한 향기가 사방에 은은하게 퍼지게 될 것이다.
2부는 ‘김단희를 향한 부정父情’이다. 아버지가 오형제이니 단희에게는 아버지가 다섯이다. 백부 김문현, 부친 김충현, 셋째 숙부 김창현, 넷째 숙부 김응현, 다섯째 숙부 김정현은 모두 유년기에 오현에서 증조부로부터 받은 가학 덕분에 시서를 기본적으로 익혔다. 그 결과 비교적 일찍 별세한 백부, 미국에 거주한 다섯째 숙부 이외의 삼형제 즉 일중一中, 백아白牙, 여초如初는 일찍이 학계와 예술계에서 득명했다.
집안의 전통을 잇는 (조카)딸이 예뻤던지 그들의 단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특별했고 그것을 시詩로 그리고 서書로 표현해 주었다. 이것이 분명 단희가 서예가로서 첫 발을 내딛고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3부는 ‘법고法古에 근거한 창신創新의 서예’다. 예술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창신이지만 창신은 법고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유년기부터 아버지를 통해 이것을 느끼고 배웠기에 김단희도 처음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법도에 맞는 한문 서예를 공부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글 궁체와 고체를 연마했다. 아버지의 학서 과정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1992년 개최된 그의 첫 서전이 말해준다.
이후 그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예술혼이 창작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한글 궁체와 고체에서 보여 준 변화미와 파격미, 그리고 판화, 종이 작업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전시에서는 그동안 그가 묵묵히 행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창신적 면모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4부는 ‘문화예술적 교유를 말하는 소장품’이다. 아버지 일중이 당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유가 활발했던 탓에, 그리고 김단희 자신도 서예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당대의 예술가들과 서화를 통해 교감할 수 있었다.
한국화가 변관식, 이상범, 노수현, 장우성, 박노수, 이영찬 그리고 홍석창, 서예가 김용진과 이미경의 작품은 대부분 작가로부터 어떤 연유로 직접 받은 것이므로 거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김단희의 소장품들을 통해 그동안 간과되었던 작가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단희의 팔순을 맞이하여 열리는 이 전시가 그의 서예 세계를 온전히 조명할 수 있고, 서단에서 그의 위상이 견고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서전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이 전시를 본 서예 애호가들은 1992년 그의 첫 전시에서 시인 이흥우李興雨가 느낀 그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경후당의 글씨를 보고는 그저 좋은 글씨가 아니라, ‘좋은 사람의 좋은 글씨를 보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주 좋은 의미에서 글씨는 사람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새삼스럽게 할 수 있는 글씨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