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작품이 되다 (권예자 시집)
권예자 | 지혜
10,800원 | 20250807 | 9791157285808
권예자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습작, 작품이 되다』는 ‘자화상’이며, 이 자화상의 역사는 습작의 역사이다. 더없이 순수하고 거룩하고, 더없이 장엄하고 숭고하다. 『습작, 작품이 되다』. 권예자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기 위하여 80평생이 넘도록 온몸으로 절차탁마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은
자신을 천천히 구겨버리는 일
도를 넘는 차별은 도르르 말아 품에 넣고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
얇게 엎드려 부피를 줄였다
가끔은 바른말도 해보고
정의로운 자의 편도 들어줬지만
결과는 늘 강한 자의 뜻대로 정해졌다
그럴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제 몸에 그려 넣은 상처의 습작들
눈가와 입꼬리에 잔물결로 번지다가
이마에 가로줄 죽죽 새기고
사이사이 세로줄 섬세히 그렸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일도
돌봐야 할 꽃과 나무도 없는 나이
무심히 고개 든 엘리베이터 거울 속
평생 습작한 작품과 눈이 딱 마주친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웃음 반 울음 반
우글쭈글 어색한 작품 한 점
- 「습작, 작품이 되다」 전문
시 「습작, 작품이 되다」는 이번 시집 중에서 감동적인 수작 중 하나이다. 자아 성찰의 깊이가 이보다 더할 수 없으리만치 시인의 생애를 처절하고도 애틋하게 응축해낸 내면적 ‘자화상 시’인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화자는 무심히 고개 든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살아온 세월이 이미 넘치도록 길었기에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이 없다는 자조적인 체념은 돌봐야 할 꽃과 나무도 없는 나이임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활동력이 저조한 나이 든 화자의 현재를 표출한다.
가끔은 바른말도 해보고 정의로운 자의 편도 들어줬지만 결과는 늘 강한 자의 뜻대로 정해졌기에 약자의 진실이 외면당하는 냉혹한 현실 인식 앞에서 자포자기했던 자신의 얼굴로 이어진다. 단념의 순간마다 보일 듯 말 듯 몸에 그려 넣은 상처의 습작들은 눈가와 입꼬리에 잔주름으로 번지다가 이마에 가로줄 주름을 새기고, 그도 모자라서 틈 사이사이의 세로줄 주름을 섬세히 그렸다고 토설하게 된다. 주름들은 지나간 생애와 축적된 세월을 몸에 새긴 흔적으로서 인생의 굴곡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차별을 당하거나 목도했다고 해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얇게 엎드려 부피를 줄였다는 묘사는 자존심을 낮추고 다소 비굴하게 생존해 왔던 삶의 방식을 가감 없이 내보인다. 그렇기에 화자는 생을 두고 해온 일은 “자신을 천천히 구겨버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 차별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자아를 방기하고, 사회적인 절대 권력이나 억압 앞에서 무력하게 방치된 자기 연민과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사회 정의와 실제 현실의 괴리를 체험한 화자의 무력감은 시의 말미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바로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웃음 반 울음 반”의 “우글쭈글 어색한 작품 한 점”이 바로 화자의 자화상으로 완성되는 연유이다. 거울 속 화자의 자화상에 독자들의 얼굴이 겹치며 투영되는 순간, 각자 자신들이 살아낸 세월이 중첩되면서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상호작용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 집단 속 자아정체성을 자문하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 사이에서, 혹은 사회라는 규범 내에서 나의 처소는 어디인가? 나는 잘 살아온 것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살아온 생의 집적은 자신만의 역사가 된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돌이켜 복기하고 수정할 수 없기에, 매번 실수하고 좌절하고 다시금 용서하며 화해해 간 모습 그대로가 빛나는 자신만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독자들을 위로하기에 이른다.
찾아가야지만 마주하게 되는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윤동주는 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고독하게 탐색하였고, 유안진은 시 「자화상」에서 허공 속 자신을 구름의 딸이자 바람의 연인이라고 자연에 빗대어 드러냈다면, 권예자 시인은 생활의 도구인 ‘엘리베이터 거울’이라는 일상속에서 마주치는 매개체를 통해 어디서나 언제나 자기 검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여기에 권예자 시인의 자화상이 그 어떤 기존의 자화상 시들보다도 위대하며, 권예자 시인의 자화상이 당장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각자의 자화상을 그려보도록 일깨우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누군가는 진수성찬으로
누군가는 눈물에 말아 먹는다
더러는 죽지 못해 씹기도 하는 밥
어떤 밥이 완성되기까지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밥솥에 전기 꽂기보다 짧기도 하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너에게 꼼짝 못 하는
나도 밥이다
- 「밥」 부분
밥은 액면 그대로 생존을 위해 섭취해야 하는 수단이자 매일 매번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 공급원이라는 측면에서 삶 자체이거나 사랑이라는 속성으로도 환치된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밥이라는 가장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삶의 복잡다단한 양상을 점층적이고 다층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시 「밥」이다. 그렇기에 인용시 「밥」에서 ‘밥’은 단순한 음식뿐만이 아니라 삶의 지속성과 인간관계를 상징하는 핵심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시에서 밥은 쌀밥, 잡곡밥, 김밥, 주먹밥 등 여러 밥이 있으며, 감자 고구마 채소 등 대체재로서의 밥도 있다고 나열된다. 밥의 다채로운 종류는 다시금 생애의 속성상 다양한 밥의 역할로 확산된다.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맞춰가야 하기에 동행과 속이 쓰려도 먹는 밥이 있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먹는 콩밥도 있음은 감옥이라는 소외 공간의 밥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진수성찬으로 먹고 누군가는 눈물에 말아 먹기도 하고 더러는 죽지 못해 씹기도 하는 밥이라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도 밥이 지닌 평등한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각해 낸다.
이러한 밥은 죽기 전까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화자는 밥을 인생으로 비유하며 어떤 밥이 완성되기까지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평균 수명 보다도 일찍 하직해야 하는 생을 지칭하여 밥솥에 전기 꽂기보다 짧기도 하다고 표현한다. 이어서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겹다 하면서도 “너에게 꼼짝 못 하는 나도 밥이다”는 선언은 밥은 곧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소모되는 희생적 존재이자 무조건적으로 공여되는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 밥과 인간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밥을 먹자는 청유는 단일한 식사 행위를 넘어서 관계 형성이나 관계 유지의 실천으로 작동하며, 정효구가 발음의 유사성으로 기술한 바대로 밥(Bob)을 먹기 위해서는 잡(Job)을 구해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밥심, 밥줄, 밥값 등의 표현들이 많듯 밥과 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등가적 연관어임이 확인된다. 더불어 밥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집약된 문화적 기호이자 삶의 근간을 이루는 헌신이라는 점에서 사랑 그 자체가 된다. 시인은 이런 다각적인 메시지를 이 시에 밥처럼 꾹꾹 눌러 담아내고 있다.
수잔 그리핀이 “우리는 여성이고 자연이다”라고 여성과 자연이 동질임을 표명하며 남성들은 자연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지만 여성들은 들을 수 있다고 확언하였듯이, 권예자 시인은 이번 시집의 도처에서 자연과 여성 간의 상보적인 관계를 상정하는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인용한 시들 외에도 만찬장에서 때 빼고 광내고 나체로 누워 있는 광어의 유언(「광어의 유언」)을 말하게 하거나, 쭉 뻗은 몸매 날카로운 입매로 바다의 칼이라 불리던 갈치도 진짜 칼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을 간파(「제주 은갈치의 꿈」)해 낸다.
동물에서뿐 아니라 식물에서도 자연과 여성의 연결성은 드러나는데, 몸을 열면 고여 있던 투명한 슬픔이 당신을 적실지도 모른다며 슬픔이 가득 차 있어 살이 무른 수밀도는 화자와 동일시(「수밀도」 )되고, 요양병원 창문 안으로 줄줄이 누워있는 희미한 백일홍 물결(「지지 않는 백일홍」 ) 에서 요양병원 환자들과 백일홍이 겹쳐진다. 이에 더 나아가 자연물에서도 여성 신체와의 동일성 회복은 이어진다. 어둠 저편에 맨발로 서서 제 몸을 씻어 무지개로 피어나는 그녀(「짝사랑이 길다」)인 노을이 등장하기도 하고, 불 밝힌 점 하나 환하게 타고 있는(「그믐을 건너는 달」) 달이 직접적인 언술로 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의 몸과 여성의 몸을 연결하여 몸의 지각을 통한 세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몸을 지니고 태어나 성장하고 노화하며,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도 이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은 단순히 생존을 증명하는 생물학적 기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숙명과 함께 시간의 한계를 품고 있는 실존의 그릇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스스로를 자각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와 접속하고 이별한다. 태어나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고, 출산하고, 죽는 모든 행위는 몸이라는 물질적 조건 위에 놓인 다양한 삶의 층위들이다.
즉 삶은 몸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섭생의 과정이자 존재의 전제여서 몸이 있기에 우리는 복합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몸으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인간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모순이며 끊임없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을 영혼과 하나인 목적 실현의 수단으로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정의했다. 그들은 몸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유한성에 주목한 것이다.
권예자 시인은 이번 시집으로 몸에 대해 정치한 사유를 하고 있고, 죽음을 자각함으로써만 삶을 깊이 있게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아들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항암 주사 부작용으로 눈만 퀭한 사랑하는 둘째의 앙상한 손”(「노란 봄날의 기도」)이라든가 “천국으로 떠난 우리 둘째 프란치스코”(「숨결 머무는 자리」)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처소에 머물던 자녀와의 결별은 시인에게 가혹하리만치 첨예한 시적 고투를 요구했을 것이고, 몸을 가진 인간이기에 사라져 버리는 운명의 비극이 탄생했을 것이다. 몸은 단순한 물체가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중심임을 설파하는 지점에, 그리고 유려한 신체 페미니즘의 여성적 글쓰기의 핵심에 권예자 시인의 이번 시집이 값하는 탁월한 시적 성취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