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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25511351
· 쪽수 : 115쪽
· 출판일 : 2007-07-31
책 소개
목차
거미
고집쟁이들
구조
그곳에서 그곳까지
낙엽 독설
등짝
디테일
똥이구나
마임
박제 거리
비문론
상대
선량한 사람들
선악과
순수성
시론-비문론
시법
시인의 말
아버지
아이들
아침
앙상한 둔부의 노래
억지스러운 시간들
엄마
염료 단편
옛날 사과
웃음
응용
이를테면
장악
제1묘지
종결 차트
창조
축일 전야
충만
폐곡선의 밤
표치
허공은 허공
현기증 비교
환장
문예지 게재작
저자소개
책속에서
시론-비문론
언어모험가의 위태로운 말 중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말이 있다. 거기에 그 말이 만드는 규범이 있다. 자생력이 있는 말은 문장의 비밀을 찾아 나가려는 의지로, 최후의 길로, 수사학(修辭學)으로, 비문의 법을 꾀한다. 그 주체인 말과 그 말의 수단인 비문저술가는 문장의 혁명가들로서 마지막 혁명을 생각한다. 그들로서만이 완성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이나 감정은 문법과 대응하는 자리에 놓으면 문장 속에서 안사(安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말의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감정과 문법이 일치점을 찾는 것 자체가 무리(無理)이다. 그것은 운용의 관계가 규칙과 오류에 머물러 있다. 말은 말마다 가능한 원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구축된 체계막사로 대피한다. 허용 규정이라는 얄미운 예비병을 지원해 둔 채.
그렇지만 말의 가능한 지점은 항상 불가능 안에서 존립해 왔다. 결합력이 없는 음소들이 모두 전투력을 갖는 건 아니다. 불가능 앞에서 문장의 정신이 살아난다. 그 언어혼령이 진정성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가. 말의 구성 속에서 본래성을 찾는다는 것은 각각의 문장에서 서로 다른 정신이 되어 있는 음소들과 음절, 단어들을 다시 규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스스로 가는 그 길의 언어 요소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문장의 변신은 문법수구자의 양심에서 확고부동한 금역(禁域)의 표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거나 드물다. 그렇다고 침묵하는 것, 즉 문법 내에서만 말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침묵의 발화법은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문장은 자잘한 기괴성이나 돌연성으로 위악감을 주는 형식이 아니다. 똑같은 문법을 가지고 그 정통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항상 새롭고 산뜻한 감흥을 주는 통합 관계에 있을 때 진정한 혁명이 이루어진다. 고전적 배열의 단순성과 불치의 문장에 대하여, 마침내 개체를 자유롭게 회전시키고 마침내 학설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180도 돌리고 마침내 선택된 제도를 거울에 비추어 좌우로 뒤집고 마침내 선택된 체제를 상하로 뒤집고, 뒤집어진다.
벙어리문장과 비문이 참담한 반감으로 맞서는 것은 그들이 가진 각각의 규칙, 즉 주입된 규칙과 통찰된 규칙의 충돌 때문이다. 비문 억제와 승화라는 음성적 체계와 양성적 체계가 마주 겨루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하다. 비문으로서는, 야무진 문법의 투철함도 순전히 습관적인 망상으로 의심해 볼 만하다. 비문은 그가 규정한 한 가지 측면의 완성이 가능하며 그것이 언어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오, 언어는 그의 것이다. 비문의 언어는 알려지기에는 너무 넓다. 그 언어를 사랑하거든 말의 불의를 이해하지 말 것! 그러나 언어를 용서하려거든 이해 못할 말을 사랑할 것! 이것이 문장의 양심이다. 말 그 자체, 궁극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의 비늘은 미지로 결을 이루고 아가미와 뼈는 근성이 투철하며 눈알과 지느러미는 집념을 상징하는 모양을 갖추고, 무엇보다도 예성(藝性)이 신기하게 뻐금거리는 입에는 엿가락 같은 끈기가 있다.
그는 태만한 문장의 소탕꾼으로서, 언어망신을 시키는 문법식민으로부터 무엇을 완성하는가? 문장 속에서, 떳떳한 죽음을 위해, 그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러나 죽음의 욕망마저 초극하기 위해서, 그의 언어는 산다. 비문의 삶을 대선택의 결실이요, 대의지의 집결이라고 거창하게 선언하는 특권은, 모든 문장으로 살기 위한 불가침 언어행낭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비문의 분노는 그 악덕만큼 단단하지 못하고 시시하게도, 하나의 연습된 감정일 뿐이다. 감정의 모든 가능성들이 열린 순간, 즉 분노하는 역할에 매혹당할 때 그는 문법본능을 억누르고 억눌린 자가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악덕의 질서는, 종국에는 승화하는 감정의 호화로운 정점(頂點)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문장의 불행까지도 긍정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감정을 선택하는 것은 분노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한 문장은 하나의 비유와 객관이다. 문장을 원하는 것은 과격하다. 표출될 수 없는 것을 속성화(屬性化)하는 것은 무지막지하다. 불을 켜지 않은 문장을 밝히는 초신성, 제2의식의 탄생은 단순히 문장의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문장은 가르쳐 주는 게 아니다. 문장을 직접적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문법이라는 증인이 나타나서, 불굴의 언어를 고발하며 괴수성에 희생될 것인가. 아니면 가장 악랄한 상상력이, 문장에 기생하는 문법을 몰살하고 준문법으로서 가용문법을 흉내 낼 것인가. 한 가지 전망이 모든 문장 앞에 고하고 있다. 말은 말의 것이 된다. 이 말이 문법을 버티는 마지막 힘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인상 깊은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