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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25536828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20-06-17
책 소개
목차
1부 하구(河口)
2부 우리 기쁜 젊은 날
3부 그해 겨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약간 허망하기는 했지만 막상 시험을 치르고 나자 의외로 기분은 담담했다. 아니 그 이상,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다 쏟았다는 일종의 자부심과 함께 내 정신의 키가 한 길이나 더 높아진 듯 원인 모를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이전과는 달리 내가 꽤 느긋한 마음으로 결과에 대한 준비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시험에 합격하면 그 뒤는 변화에 맡긴다. 만약 불합격이면 지금껏 해 온 것보다 더 철저하게 떠돌면서 한 세상을 보낸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내게 원하는 역할 같으므로 ? 그것이 당시의 내 결정이었다.
‘너는 말이다, 한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여섯 시간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 시간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그리하여 진정으로 용기 있게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 행동했던 이들에게는 죄스럽게도, 나는 차츰 심한 자기모멸과 원인 모를 부끄러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껏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소년시절의 충동적인 모험의 연장이며, 추구하는 것 또한 영광과 승리의 동참자로서 나누게 될 자랑스러운 기억 따위나 아닐까.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힌 지성의 정신적인 자위행위거나 우리도 언젠가 빼앗기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노력한 적이 있노라는, 장차 혜택받는 계층에 끼어들었을 때의 변명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 그것이 그 무렵 이미 병적인 피로에 빠져 있던 나의 결론에 가까운 자기검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