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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경제경영 > 기업 경영 > 경영전략/혁신
· ISBN : 9788927804116
· 쪽수 : 246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_ 우리만 모르는 이순신
1장 역사를 만든 습관
역사의 승자는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디테일
기록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이정암과 이순신, 두 개의 보고서
2장 살아남기 위해 창조하다
판옥선을 만들어라
전쟁의 조짐을 읽다, 거북선 제작
기술이 곧 승리다, 조총 개발
염초를 찾아라, 화약의 대량생산
수익창출을 모색하다, 해로통행첩과 염전
차가운 전쟁터 뜨거운 시 한 수
3장 원칙을 지키는 리더가 마음을 얻는다
리더가 먼저 지킨 원칙, 천 명이 따른다
서릿발 같은 처벌
임금에게 대충징발을 주장하며
배고픈 군사는 싸울 수 없다, 둔전경영
누군가가 기댈 언덕이 되어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왜군의 목을 바친 이유는?
4장 항로는 리더가 정한다
소통하는 조직은 싸움에 패할 일이 없다
임금의 청을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
승산 없던 전투, 연설이 일으킨 기적
기록은 언제나 분명한 진실이어야 한다
전쟁터에서 쓴 편지
5장 불리한 현실에도 유리한 것이 있다
연전연승의 비밀,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협상이란 무엇인가
첩보를 바탕으로 한 전략, 이겨놓고 싸워라
천 명을 움직이는 힘, 소통
불통의 비극
가지 않은 길
6장 위기일수록 사람을 믿어라
부하의 성장을 위한 특별한 배려
백성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간하는 조정 이순신의 충정
나이를 뛰어넘은 백발노장과의 파트너십
이순신을 구하라, 부하들의 구명운동
전쟁터에서 접한 가족의 비보
이순신을 빛낸 핵심 참모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조선 전체 민심이 이순신을 향한 이유는 단순히 백전백승의 스타장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란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임금은 피난했고 대신들은 당쟁했고 수령들은 도망갔다. 그러나 이순신이 주둔하는 지역에는 둔전경영과 같은 백성과 군사들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구휼정책이 있었다. 원칙과 법규에 따라 공명정대하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또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솔선수범이 백성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짐을 싸서 이순신이 있는 전쟁터로 피난을 갔고, 없는 식량을 털어 이순신에게 쌀과 떡, 고기를 바쳤다. 백성과 군사의 마음을 얻은 이순신은 연전연승 파죽지세의 승전고를 울릴 수 있었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이 맞는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실로 끔찍하고 무섭게 죄를 다스리는 모습 때문이다. 탈영을 한 부하는 무조건 목을 잘라 장대에 높이 매달았다. 이순신은 군졸은 물론 장수, 즉 첨사와 만호까지 불러다 곤장을 쳤다. 종4품 이상이면 무관의 품계로 이미 장군의 반열이다. 현재의 계급으로 여단장(준장) 정도의 장군들까지 곤장을 쳤다는 얘기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공동 발표한 ‘사회 무질서’에 관한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순신의 ‘필벌의 원칙’은 ‘깨진 유리창’의 교체였다. 도망병들은 끝까지 추적해서 참수한다는 발본색원의 메시지, 태만하고 오만하여 명령을 듣지 않는 장졸들은 가차 없이 곤장으로 처벌한다는 일벌백계의 메시지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무언의 경고였다.
횡포하기로 소문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7월 16일 고금도에 당도하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진린은 포악하고 사나웠으며 명나라 군사들은 전쟁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스스로 인맥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 7월 19일 이순신은 절이도해전에서 베어온 왜적의 목 40여 급을 진린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모든 승첩은 바로 대감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대감에게 드리니 여기 온 지 몇 날도 되지 않아 황제에게 이 공을 아뢴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먼바다로 피해 딴전을 부리고 있던 진린이 크게 기뻐하였음은 물론이다.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했던 시간은 불과 4개월 남짓, 하지만 호령과 지휘권을 이순신에게 양보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이야(李爺)’라고 불렀다. 어버이 야(爺)를 붙인 극존칭이었다. 또 이순신에게 “작은 나라 조선에 살 사람이 아니니 명나라로 들어가 벼슬을 하라”라고 여러 차례 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