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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문학 > 청소년 소설
· ISBN : 9788932020600
· 쪽수 : 240쪽
책 소개
목차
이슬람 정육점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운명은 면식범이다.”
제기랄, 이런 화법은 「수사반장」 탓이었다. 운명은 우리 주위에 기거하면서 호시탐탐 우리를 수렁에 처넣으려고 기를 쓰는 녀석이다. 우리는 녀석을 안다고 믿기에 방심하게 되고 운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최초이면서 최후인 발길질로 간단하게 우리를 끝장내버린다. “그러니까 얘야, 네가 겪어보지 못한 운명이란 없단다―이 불쌍한 녀석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네가 태어날 때 너만 태어난 게 아니라 너의 운명도 함께 태어났거든.” 그날 운명은 나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방심했던 탓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낯선 이가 찾아오면 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하산 아저씨를 보고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까맣게 모른 채 너른 개활지에 홀로 핀 들꽃처럼 서 있었던 거다. (17~18쪽)
배가 고프지 않아도 라면을 끓여 먹었다. 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면 내가 사는 곳이 고아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석유곤로의 심지를 돋우고 유엔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화구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심지 손잡이를 좌우로 움직여주면 이내 불꽃이 자리를 잡아 푸르게 익었다. 나는 석유 사르는 냄새가 좋았다. 아득한 사막 혹은 바다 아래 어느 퇴적암에서 끌어올린 순결한 액체들이 타는 냄새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의 심정과 흡사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야모스 아저씨는 전쟁터의 병사들은 누구나 자신이 천국에 갈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가 지금 견디는 이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이라고. 수긍할 수 없었다. 살아서 지옥인 사람이 죽어서라고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지옥에서 살았던 사람이 지옥 이외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지옥일 뿐이겠지. (26~27쪽)
“반품이 안 되는 건 아시죠? 설령 저 녀석이 사고를 치거나 감당하기 힘든 불량배로 자란다 해도 저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장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를 껴안았다. 원장의 머리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산 아저씨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어르신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언젠가 찾아가서 혼을 내줄 거니까.”
원장은 껄껄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배워두기로 했다. 언젠가 돌려줄 기회가 있을 테니까. 하산 아저씨가 원장은 무시한 채 내게 말했다.
“아이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백 년 뒤에도 이곳에서 숨 쉴 자는 단 한 명도 없단다. 우리 모두 이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 말이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거나 나를 감동시켰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순순히 하산 아저씨를 따라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