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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29955
· 쪽수 : 382쪽
책 소개
목차
흔적
연대기, 괴물
세상의 모든 저녁
간이역
이야기 집
남생이
물 위의 생
해설 임철우, 사도 바울_ 김형중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병원 옆 골목에 주차한 다음, 당신은 개를 안아 내렸다. 병원 유리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품 안에서 개가 갑자기 끙끙대며 안 들어가겠다는 듯이 발버둥을 쳤다. 지금껏 수차례 드나들었음에도 그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뭔가 육감으로 눈치를 챘던 것일까. 마침 대기실은 비어 있었다. 수의사를 따라 곧장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찰대 앞에서 개는 또 한 번 끙끙대며 거부하는 시늉을 보였다. 그 역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막상 진찰대 위에 오르자 개는 바닥에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못 움직이게 단단히 잡고 계셔야 합니다. 수의사가 말했다. 당신은 두 손과 어깨로 개의 앙상한 몸뚱이를 바짝 감싸 안았다. 퀭한 눈으로 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미안하다 머루야. 내가 곁에 있으마. 무서워하지 마. 개의 앙상한 뼈대와 부석한 털을 연신 쓰다듬으며 당신은 중얼거렸다.(「흔적」)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 탁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동일한 이야기인데도 매번 다시 풀어낼 때마다 새롭고 감칠맛이 났다. 물론 그녀 역시 자신의 고정된 역할을 꽤나 즐기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녀의 기억 창고에 저장된 목록은 실로 다채롭고 무궁무진했다. 자신의 생애는 물론이고 이웃들, 사돈네 팔촌 친척, 심지어 오다 가다 잠시 스쳐 간 이들의 사소한 흔적들까지도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이야기 집」)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그는 소파 옆 어항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조명등이 환히 켜진 네모난 어항 속 세상을 깨알만 한 열대어들이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꿈속 여자의 기이한 얼굴이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윤곽도 형태도 문드러져버린, 희멀건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 그는 현실에서 보았던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런데 마찬가지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어제 낮에 산책로에서 마주쳤을 때 여자의 얼굴을 비교적 자세히 보았었다. 무심코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내심 흠칫 놀랐었고, 최소한 여자는 2, 3초 동안이나, 다소 무례하다 싶도록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그랬는데,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니, 그는 어리둥절했다.(「남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