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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042763
· 쪽수 : 148쪽
· 출판일 : 2024-05-13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입춘(立春) | 충청도 |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 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 | 겨울병 | 종과 횡과 사선으로 | 우리 사이 꽃 | 나날들 |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
2부
렌드로 카이프테 | 청소부 천사 | 현대시 | 하이쿠 | 모든 것과 그 밖의 다른 것 | 방 안의 집 | 오일 페인팅 | 홍시와 홍시 | 미인이 하는 게임 | 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3부
우회전하면 영화제 | 시티 커피 | 121분 | 입 모양을 읽었거든 | 일기 | 시선을 내려놓고 | 샌드위치 시스템 |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 낯선 거품과 맥주잔 | 우유 전구 | 열대어
4부
유령의 집 | 적산가옥(敵産家屋) | 지팡이 | 소파 오페라 | 사라진 대표님 | 모르는 엉덩이 | 손을 들어서 | 오렌지 절벽 | 설탕물 | 놀이터 | 주공아파트 | 하루보다 긴 일기
해설
어른의 성장통·김영임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걸어가야 할까
나는 할 수 없이 벗은 채로 물에 들어가
다시 헤엄을 쳐
그러다가 문득 방금 도착했을 때
이가 달달 떨렸을 때
그때가 한중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나는 크게 원을 그려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계속 큰 원을 그려
나 이번엔 도착하면 옷을 집어 입고 그대로 달려나갈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달릴 거야
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나의 한중간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호수를 나와 맨몸으로 서서 이를 달달 떨었던 일은 잊히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내 앞의 풍경들은 점점 바뀌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앞의 풍경들이 바뀐다고 뒤의 풍경도 바뀐다는 희망은 품지 않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 부분
갑자기 멈춰 세우지 마
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지기 쉬워
아침에 일어나면 뭐든 씹어 삼키려고 한다
침대는 내 혼잣말을 어떻게 다 듣고 있는지
아마 영원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해
[……]
잠시 눈을 감으면 지난밤 혼잣말이 혀끝에 감돈다
막막한 질문들이 체스 판 위의 말처럼 소년을 옮긴다
소년은 체스 판 위에서 퀸이 된다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다
―「종과 횡과 사선으로」 부분
지금 가게 주인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팔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당장 밖에 나가 조금만 걸어가도 나는 다른 가게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곳에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없을 리 없다. 나는 주인의 눈을 쳐다봤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무표정이 있다. 누군가는 약간 찡그린 미간이 무표정이고 누군가는 희미한 미소가 무표정인데, 가게 주인은 무표정이 무표정이다. 온갖 표정이 내려앉는 곳.
커피에 대한 철학이 깊은 건가. 하지만 철학과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무슨 상관일까. 추운 날씨 때문일까? 철학도 상관이 없는데 날씨는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주인을 쳐다보다가 벽에 붙은 메뉴판을 읽어본다. 정말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메뉴가 없다.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도 없다. 이게 그저 장난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중요한 선이 하나 빠진 설계도를 보듯, 혹은 유출된 기밀문서를 보듯이 메뉴판을 샅샅이 쳐다본다.
[……]
사랑은 금세 삶 쪽으로 쓰러진다. 바닥이 더러운 이유다. 비유가 너절한 이유다. 참,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모르게 된다. 그러니 다시 모르게 된다. 누군가 나의 단점을 묻는다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시티 커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