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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기타 국가 소설
· ISBN : 9788932405063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21-07-30
책 소개
목차
첫 번째 정거장
두 번째 정거장
주
해설 - 현대에서 고대로, 기술 문명에서 자연으로 거슬러 가는 여행
판본 소개
막스 프리쉬 연보
리뷰
책속에서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타마울리파스에 비상 착륙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이 헹케라는 젊은 친구를 알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나에 관한 소식을 다시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난 생각했다. 순전히 심심풀이로 비교해 본 거다. 자베트는 그 당시 한나처럼 젊고 게다가 똑같이 표준 독일어를 구사했다. “표준 독일어를 말하는 사람이야 쌔고 쌨지.” 그렇게 난 혼잣말을 했다. 몇 시간이고 그 애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는 하얀 난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지그시 바다를 바라봤다. 아쉽게도 전문 잡지는 없었고 소설은 읽을 수 없던 터라, 난 차라리 이 떨림이 어디서 오는 건지, 왜 이 떨림을 피할 수 없는 건지 이리저리 생각하다, 한나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흰 머리가 났을까 계산해 보았다. 그러다가 잠이나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내가 노래를 하다니! 노래는 엉망이지만 어차피 듣는 이도 없다. 마차에 매인 말이 텅 빈 아스팔트에 놓여 있다. 치마를 펄럭이며 가는 소녀가 마지막으로 보인다. 치마가 날릴 때면 얼핏얼핏 보이는 갈색 다리. 마찬가지로 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녹색 블라인드. 먼지 속으로 터져 나온 하얀 웃음. 녹색 블라인드가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져 바다 위로 날아간다. 하얀 도시에 찾아든 밤. 먼지 속 도시 위로 불그스레한 색이 물든다. 열기. 쿠바 국기. 난 그네를 타며 흥얼거린다. 달리 뭐 할 게 있으랴. 그네의 옆자리는 비어 있고 주철 가로등이 피리 부는 소리를 낸다. 꽃들이 소용돌이친다.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