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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2920719
· 쪽수 : 632쪽
책 소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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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양에게 푹 빠진 거지?」 앨리스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고 앨리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나는 앨리스가 아니라 어둠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키티 버틀러를 보면, 마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치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에 뭔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와인이 들어 있는 와인 잔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키티 버틀러 앞의 공연들도 보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먼지와도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키티 버틀러가 무대로 걸어오면……. 그 여자는 너무 예뻐. 옷도 무척 멋지고, 목소리는 아주 달콤해. 키티 버틀러를 보고 있으면 울고 웃고 싶어져. 동시에 말이야. 그리고 날 아프게 해. 여기를.」 나는 가슴에, 흉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전까지 키티 버틀러 같은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키티 버틀러 같은 여자가 있다는 걸 몰랐어…….」 내 목소리는 떨리는 속삭임으로 바뀌어 있었고, 곧 나는 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키티의 장식이자 메아리였다. 나는 키티가 밝게 빛나며 무대를 가로질러 던지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림자로서 나는 키티에게 그전까지 없었던 깊고 선명한 가장자리가 되어 주었다.
그건 전혀 하찮은 일이 아니었고, 나는 만족했다. 오직 사랑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공연이 잘되면 잘될수록 사랑도 더 완벽하게 자란다고 생각했다. 결국 둘은, 공연과 우리 사랑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은 함께 태어났다. 아니 내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대로라면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으며 단지 둘 중 하나만이 남들 앞에 보이는 형태를 취했을 뿐이었다.
나는 불쌍하고 혼자이며 아무도 돌봐 줄 이가 없었다. 나는 연인들과 신사들을 좋아하는 도시에 사는 외톨이 여자였다. 여자 혼자 걸으면 눈총만 받을 뿐인 도시에 사는 여자였다.
그날 아침에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키티 옆에서 불렀던 그 모든 노래들을 통해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한때는 런던의 여러 공연장을 오가며 신사복을 입고 수없이 뻐기며 걷던 내가 이제는 계집애의 수줍음 때문에 거리를 걸으며 두려워해야 하다니! 정말 잔인한 농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