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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2912660
· 쪽수 : 608쪽
책 소개
목차
로드 짐
작가의 노트
역자 해설: 소설로 인간을 항해하다
조지프 콘래드 연보
리뷰
책속에서
이건 망신이야. 우리 중에는 온갖 종류의 인간이 있고, 그중 몇은 성유를 바른 악당이지. 하지만 젠장, 우리는 직업적 존엄성을 지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떠도는 땜장이보다 나을 게 없잖아. 우리는 신뢰를 받고 있어. 내 말 알아듣겠어? 신뢰를 받는다고! 솔직히, 나는 아시아에서 온 그 모든 순례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하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낡은 넝마 짐짝을 싣고 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는 않아. 우리는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그런 인간다움이라는 명분뿐이지.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면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는 거야. 강인함을 보일 기회가 전혀 없이 바다 생활을 거의 마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기회가 왔을 때는…… 아! 만약 내가…….
〈선장님은 제 등 뒤로 뱃머리 아래쪽 갑판에서만 160명이 곤히 잠들어 있고, 고물 쪽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잠든 상황에서 제가 저 자신만 생각했을 거라고 여기십니까? 그리고 위쪽 갑판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습니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구명정에 태울 수 있는 사람 수보다 세 배는 더 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제 눈앞에서 철판이 갈라지고 그 사람들이 누워 있는 곳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 어둡고 동굴 같은 곳에서 대양의 물이 가하는 무게를 버티는 칸막이벽과, 벽 일부를 비추는 공 모양 램프 불빛 아래 아무런 의식도 없이 잠든 승객들의 숨소리를 듣는 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떨어져 나온 녹 덩어리를 보고 깜짝 놀라며 절박한 죽음의 예감에 짓눌린 짐이 철판을 응시하는 모습도 눈앞에 그려지고.
판에 의지해 침몰을 간신히 면한 채 뱃머리를 숙이고 있는 배를 선장님은 지켜보신 적 있나요? 네? 배를 버틴다! 저는 그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칸막이벽에 5분 안에 버팀목을 댈 수 있겠습니까? 아니, 50분이 있다고 해도 가능하겠습니까? 배 아래로 내려갈 사람은 어디서 구하고요? 그리고 버팀목은요? 버팀목을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 칸막이벽을 본다면 그 누구도 감히 버팀목을 세우기 위해 한 번이라도 메질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선장님은 했을 거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선장님은 직접 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제길, 그런 일을 하려면 적어도 가망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천에 하나라도 가망이 있어야 한다고요. 실오라기 같은 가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벽을 보셨다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으셨을 겁니다. 그 누구도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을 겁니다. 선장님은 제가 그곳에 그냥 서 있기만 했다고 저를 망나니 놈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선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떻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요. 상황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장님이라면 제게 무슨 일을 시키셨겠습니까? 저 혼자 힘으로는 구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승객 모두를 겁에 질려 미치게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보세요! 지금 제가 선장님 앞에서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