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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4991540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1-04-05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버지는 다시 나를 보았다. “내가 네 엄마를 만나기 전에.” 아버지는 손가락을 모아 주먹을 쥐며 말했다. “네 엄마와 콘스턴스…… 둘은 사귀는 사이였어.”
나는 아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엄마가요?” 나는 《밀랍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엄마가 이 여자랑 사귀었다고요?”
“그래.”
“엄마가 레즈비언이었어요?”
“글쎄다, 로지. 그럴 수도 있고. 한동안 둘은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널 낳았으니 내가…… 장담할 수는 없구나.”
“그럼 양성애자였어요?”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온몸을 둥그렇게 말고 다시는 펴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삼십 년 넘게 마음을 죄어온 메시지와 더는 싸울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누구인지, 대체 나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아무런 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전도 없고 서투르기만 한 내가 부끄러웠다. 누구나 상실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고 집착이 있지만, 남들은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해낸다. 포기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느 여자 유령과 자신만의 환상 속에 사는 남자친구에게 사로잡혀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내겐 몰도, 엄청난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내 이름으로 발표한 책도, 바닷가에서 함께 살 아내도 없었다.
임신하고 첫 석 달은 어이없을 정도의 원초적인 피로와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잘한 메스꺼움에 시달렸다. 주말에는 눈을 떴다가 다시 다섯 시간을 더 자고 일어나도 피곤했다. 침대에서 변기로, 다시 침대로. 이따금 주방에 들러 물 한 잔을 마시고 종이 타월을 가져다 화장실 타일에 묻은 토사물을 닦느라 비틀거리는 동안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왜 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과학적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지 않을까.
여자는 여기에 침착하게 대처해야 하며, 계속 일하고 먹고 자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엘리스에겐 이 상황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세상이 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엘리스에게 알려주는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다산하는 여자를 원하는데, 하늘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내려서 방해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진통제도, 소독 장갑도, 부드러운 베개도, 멍하니 볼 텔레비전도 없이) 앞서 살았던 여자들을 생각했다. 이상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자신이 겪는 일을 그 여자들도 겪었을 텐데, 사회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누군들 이상해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