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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6424923
· 쪽수 : 104쪽
· 출판일 : 2023-08-23
책 소개
목차
간병/보청기/첼로/껍질/도공/구두/일출/승진/비닐봉투/왼손/병원/목련/잎망울/측정/철봉/겨드랑이/소원/걸음마/산수국/은행/월경/수정/운명/신발/독서/해바라기/발아/움/숨/배추밭/별똥별/백발/치매/계부/용접/성냥/음악/분홍달/분재/자유/첫사랑/미역국/맥박/하품
시인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새하얗고 너른 침상 위로
너무 일찍 떨어진 감꽃에
어린 벌이 찾아와 있다.
싱그러운 초록과 비린 향기가
미처 식지 못한 꽃잎들을
벌이 허리 굽혀 어르고 매만진다.
창백한 꽃의 얼굴에 더 가까이 벌은
설익은 꿀이 말라붙은 입술을 핥고
푸석해진 화분을 살결에 펴 발라준다.
꽃은 작고 벌은 서툴다. 하지만
꽃은 다 시들지 않았고
벌은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간병」 전문
아는 만큼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이는 병자다.
확실하고 부재하는 장면들이 더 많이 보이는 이곳에서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자들은 내가 건강하다고 말한다.
강자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한다.
눈에 어른거리던 유령들은
긴 복도를 관통해 사라져가면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어느 날은 아무도 없는 뜰로 나간다.
커다란 나무가 올려다보이는 그늘에 쪼그려 앉아서
빛이 보여, 빛이 보여, 발작을 해가며
어둠 속에서조차 부신 눈을 뜨지 않은 채
나는 없는 것만 믿는다.
―「병원」 부분
비구는 읊조리던 불경을 거두고 목탁을 놓는다.
테두리가 갈변한 두 손을 합장해 반배를 올린 뒤
목 꺾어 연기로 살 내음 사리는 향불과 함께
천천히 무릎부터 무너지며 엎드리기 시작할 때
창백하고 표정 없는 뒤통수 곁에서
구겨져 떠오르는 손바닥은 이미 모든
소리를 다 들은 귀처럼 고요하고
팔꿈치를 괸 삭은 뿌리 아래
텅 빈 두 발을 뒤집어 서로를 포개면
시들도록 저문 겹겹한 묵언들과
미처 떨구지 못한 한잎의 입술이
깊게 파인 이마 짚고 오래 기다렸던 자리로
새하얀 빛이 고여 한참을 늙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한그루의 품이 너른 잿그늘을 두른 채
바닥에서 웅크린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목련」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