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6425234
· 쪽수 : 124쪽
· 출판일 : 2025-10-24
책 소개
다시 태어난다”
세속의 풍경을 수행처럼 건너며 길어 올린 구도적 서정
소멸과 생성이 맞닿는 자리, 순환하는 삶과 언어
“광목처럼 풀리는 새벽 강에 나가서
주낙을 걷어 오는 사내가 되고 싶은 날이 있었다”
묵묵한 시선과 쓰기로 이어지는 내면의 순례
장철문의 시는 격정적이지 않음에도 울림이 깊다. 그 울림은 일상의 미세한 틈을 묵묵히 들여다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는 언제나 거창한 사건보다는 “페달을 밟아서 우동을 먹으러”(「우동과 자전거」) 가거나 “휴게소 뒷길이나 서성이”(「옥천사 가는 길」)는 소박한 여정 위에서 사색에 잠긴다. 본래 허름한 세속의 순간들이 곧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궁핍과 피로 속”에서의 오랜 생활 끝에 뭇 존재들이 새기는 “어떤 형태와 색”(「작은 미술관을 나오며」)을 찾아 헤매는 과정은 시인의 고유한 수행이자 쓰기의 방식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성(聖)과 속(俗)의 경계는 필연적으로 맞닿는다. 시인은 이제 안다. 깨달음과 욕망은 결국 한 몸의 그림자라는 것을. 붓다의 다비장을 찾은 순례길에서 “청년 둘이 벤치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야동을 돌려보”(「성지순례」)는 풍경을 담담히 적어두는 시선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른 휴게소의 뒷길에서 빛바랜 동백을 망연히 바라보던 자신을 회고하는 일과 닮았다. 거룩함은 세속에 깃든다. 시인은 이제 수행자의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흰 치아를 드러낸 미소와
말소리만은
아직 진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햇살은 거기 있으나 등짝의 따스움은/벌써 가고없는” 세계를 그리면서도 시인은 “아무려나/좋다!”(「불확실성 시대,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하면서 사라짐을 슬퍼하기보다 사라지는 순간의 온기를 붙잡는다. “땅에 붙박인 나무”들이 “필사적으로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넓”(「숲은 고요하지 않다」)혀가는 생명의 안간힘을 목도하면서 상실과 이별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임을 새로이 직감하기도 한다. 그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에 천착하지 않는다. 다만 이생을 함께한 이의 “보리똥나무 가지를 흔들던/자디잔 웃음소리”를 “아껴 먹는 생의 식량”(「그 생에도 보리똥나무가 있을까?」)으로 삼을 뿐이다. 상실과 결핍의 고통을 견디며 삶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이 과정을 시인은 ‘슬픔’과 ‘사랑’이 하나로 엮이고 섞이는 “떨림의 파문”(「방울벌레 울음소리를 물었다」)이라 이른다. 결핍 속에서 충만을, 소멸 속에서 생성을 길어 올리며 그가 기록하는 것은 탄생하고 사라지는 존재의 순환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생의 숨결이다.
시인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들추듯 아득한 기억 속 정경을 ‘지금-여기’의 풍경으로 되살려내기도 한다. 평생을 “허기가 시켜서” 떠돌던 시인의 삶 위로, “출가하겠다는 아들을 뒤세워/삼겹살을 끊어다 구”(「우동과 자전거」)워 주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와 “임종도 없이”(「늦은 임종」) 보내야 했던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이 포개진다. 이제 어머니도 할머니도 세상에 없고, 시인은 “어머니의 본관과 이름이 박힌/섬돌”에 “꾸지뽕 쓰레빠나 두어켤레 던져두”(「꾸지뽕 쓰레빠」)는 것으로 그리움을 대신하고, “콧물에 눈물을 섞어서” 할머니의 “늦은 임종”(「늦은 임종」)을 지켜본다. 장철문에게 시란 이렇듯 부재의 자리를 비워둔 채 그 안에 남은 온기를 더듬는 일이자 사라진 이들의 숨결을 다시 불러내는 언어의 형식이다.
“소실된 길 끝에 길을 놓아서”
새로이 내딛는 걸음
“늘 길에서 비껴”(「옥천사 가는 길」)나던 고단한 삶 속에서 “두려운 도시의 거리와/여러 직장과/해안과 오래된 골목”(「능선 너머」)을 오가는 동안 시인은 막다른 곳에 다다르거나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비로소 “소실점을 향해 가”(「작은 미술관을 나오며」)던 길 위에서 “순간의 생과 지나간 생과 다가올 생”이 서로를 향해 자유롭게 “유영하고 뒤척이는”(「용이 알을 품을 때」) 새로운 길을 독자들 앞에 열어두었다. 그 길을 묵묵히 걸으며 시인은 “가만가만 숨결에 오는 말”(「말」)을 받아 안아 “써야 할 시”(「숲은 고요하지 않다」)를 오래오래 써나갈 것이다. “아직 시인이라는 것”(시인의 말)에 감사하며.
목차
제1부
악의에게
숲
식당 칸은 없다
소를 보다
숲은 고요하지 않다
공양
우안거
한파주의보
네 얼굴과 그것에 대하여
물풍수 이야기
발을 닦으며
성지순례
제2부
임종
능선 너머
그 오뉴월 한나절
꾸지뽕 쓰레빠
석다
우동과 자전거
방울벌레 울음소리를 물었다
늦은 임종
통증에 대하여
그 생에도 보리똥나무가 있을까?
왜 많은 가지와 잎을 가졌을까?
발자국
제3부
말
잠긴 돌
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낙화 동백
봄 내
거기 지금
동백
서어나무에게 간다
곁에 없고
불어라, 바람
수련
연두 생각
제4부
놀다
용의 자취를 기록함
용이 알을 품을 때
불확실성 시대,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어여쁜 루어
산도라지밭에서
작은 미술관을 나오며
저자소개
책속에서
네가 여기 있었구나
여기 피어 있었구나
떨고 있구나
괜찮아,
함께 있어줄게
마른 잎사귀 사이에 검은
뿌리를 두었구나
괜찮아,
부러뜨리지 않을게
돌아갈 때까지 함께 있을게
아주 작은 씨방을 가졌구나
겁먹은 내 심장을 닮았구나
―「악의에게」 전문
맛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맛은 사라진다
김밥이 차곡차곡 사라지는 것처럼
달다는 감각과
달다는 것을 아는 지각은 각기 일어나고 사라진다
지나간 사랑이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짜다는 것은 단무지 속에 있지 않다
혀 속에 있지 않다
기차의 첫째 칸과 둘째 칸과 셋째 칸이 서로 같지 않은 것처럼
첫째 맛과 둘째 맛과 셋째 맛이 각기 일어나고 사라져서 다시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맛은 없다
단무지와 혀 사이에서 일어나서 사라졌다
(…)
맛은 지나갔다
한번 일어난 맛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칸을 건너왔다
셋째 칸에서 일어나서 일곱째 칸의 지인을 만나러 왔다
KTX는 달리고, 식당 칸은 없다
―「식당 칸은 없다」 부분
수행자들이 서 있다. 줄지어 공양간에 서 있다. 밥을 뜨려고 식판을 들고 서 있다. 밥과 국을 더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뜨고 씹는 소리를 들으며 서 있다.
(…)
수행자들이 마음을 가진 슬픔으로 와서 몸을 가진 슬픔으로 서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동작이 툭, 툭, 끊겨서 이어지는 옛날 활동사진처럼.
수행자들이 몸을 먹이려고 서 있다. 혼자 서 있다. 저마다 저에게서 혼자 서 있다. 흐릿하게 서 있다
―「공양」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