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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 ISBN : 9788936513788
· 쪽수 : 380쪽
· 출판일 : 2019-08-20
책 소개
목차
이 책에 등장하는 목사의 자녀들
서론
1.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탄생한 목사 가정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가정생활
가톨릭 사제의 결혼이 합법화되다
관심의 표적이 된 직업, 개신교 목사
목사직의 열악함과 새로운 과제들
목사의 교육 부족에 대한 고민
역할 모델로서 목사 가족
2. 18세기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시대를 이끈 목사들
구 프로테스탄티즘과 경건주의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목사의 특권
목사 부인의 근본적 역할
목사 계층의 자기보존 계획
농촌 목사, 농부인가 시민인가?
후대가 기억하는 18세기 목사 직업
3. 신분사회와 근대의 사이에서, 19세기 목사의 역할 갈등
국가와 밀착된 목사의 신분
목사, 공무원이 되다
직업 역할에 대한 정체성 찾기
목회 이외의 부수적 활동들
이상적으로 각색된 목사 가족
가정과 세상 사이의 목사 자녀들
목사 가문의 각인력
목사 후보자의 삶
도시 목사와 농촌 목사의 생존 방식
현대화의 중재자이자 미풍양속의 파수꾼인 농촌 목사
교회와 멀어지는 도시
사회적 문제들 앞에 선 목사의 역할 갈등
보수에서 진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목사들
4. 1918-1989년, 목사 가정의 위기와 변화
나치즘과 목사
동독 정부의 탈 기독교화
일차대전 후 목사의 자녀들
목사 가족 구조의 변화
목사 부인을 위한 새로운 직업상
교회 개혁 프로젝트
5. 오늘날의 목사 가정
교회, 폭풍 치는 바다에 빠지다
목사직, 사회 조절 기능을 잃다
여성 목사와 직업이 있는 목사 부인
세속화 시대에 목사를 바라보는 관점
오늘날의 개신교 목사관
목사의 역할 논쟁
교회 이탈 현상
드라마 속 목사의 현실
목사도 고독할 수 있다
결혼 위기에 처한 목사
집 없는 목사?
개신교적인 생활 양식
맺음말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부록
참고 문헌
책속에서
개신교 목사관의 원형은 수도원이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영주인 선제후選帝侯 현자賢者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1463-1525)는 1524년 이 개혁가에게 비텐베르크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거주지로 하사했다. 루터가 이 커다란 집을 넘겨받았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루터처럼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은 집을 떠났고, 쓸 수 있는 가재도구들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루터는 거의 텅 빈 업무용 건물을 거주지로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급여가 크게 오르지 않았더라면 건물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루터가 결혼하고 가족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목사관이 되었다.
_ ‘1장.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탄생한 목사 가정’에서
농촌 목사는 농부이자 시민이었다. 반면 도시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이 이중적인 삶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특징을 ‘시민화’라 할 것인지 ‘농부화’라 할 것인지 묻는다면, 답은 다양할 것이다. 계몽주의나 경건주의 아니면 그 중간적 성향을 지녔건 상관없이, 많은 목사들은 농촌의 시민이자 그의 이웃보다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농촌 귀족이나 부농과는 다른 계층에 속했다. 새 목사가 부임해야 할 경우, 후원자인 농촌 귀족은 주로 경건주의 목사를 선호했으나, 목사들과 사회적 친분 관계를 맺으려 하지는 않았다. ‘낮은 계층 사람들’은 목사를 귀족 주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귀족 주인과 목사는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귀족의 아들들은 목사가 되는 것을 소명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목사 고유의 직업의식 및 신분의식은 정해진 사회적 한계 안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고, 늘 그렇듯 이런 의식은 각 목사관의 물질적·사회적 여건에 좌우되었다.
_ ‘2장. 18세기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시대를 이끈 목사들’에서
목사 부인의 활동 장소는 대부분 목사관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시민 여성들에게 제공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목사 부인들도 활동할 수 있었다. 주로 전도를 위해 수예협회를 조직하거나 다른 부인들과 함께 구제사업 영역에서 일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목사 부인들이 점차 사회복지·초등교육 분야 직업에서 교육할 수 있게 갖춘 능력이 이런 외부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농사의 부담이 덜어짐으로써 목사 부인은 농촌에서도 남편과 함께 ‘시민화’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목사의 정원을 경작해야 해서 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이제 목사 부인은 농부에게 유능한 시민적 살림살이의 수호자가 되었다. 충분한 인력을 쓸 수 없다고 종종 불평하기는 했지만, 목사관에는 농촌에서건 도시에서건 고용인, 즉 하인과 하녀가 여전히 살림을 돕고 있었다. 목사관이 목사 부인에게 부여한 한계는 여전했다. 즉 목사 부인은 남편의 이상적인 조력자였고, 부지런하고 경건하며, 집과 아이들을 돌볼 책임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예배에 책임이 있어 노래를 하기도 했고, 남편이 아프거나 과도한 부담을 느낄 때면 남편을 위해 일해야 했다. 환자 방문을 맡은 것처럼, 목사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돌봐 주거나 꼭 필요한 것을 장만해 주어야 할 때면, 사회복지기관으로서 봉사할 수도 있었다.
_ ‘3장. 신분사회와 근대의 사이에서, 19세기 목사의 역할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