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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77317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5-07-18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운동장 10,713바퀴를 달린 후에
오픈마이크
사과 여덟 개
오픈마이크
바르게 살자
오픈마이크
에필로그
발문_박혜진(문학평론가, 편집자)
유머는 절망보다 깊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여덟 살 때부터 나는 집안 돌아가는 꼴이 못마땅할 적마다 배낭에 짐을 챙겨 시내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외조부모 댁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풀 죽은 목소리로 방문을 예고하면 나의 외할아버지 치릴로가 정류장에 마중을 나왔다. 치릴로는 그의 두꺼운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용두시장의 골목골목을 돌았다. 그는 악력이 너무 셌고 걸음이 너무 빨랐다. 나는 약간 끌려가듯 그의 걸음에 발을 맞추며 내가 어린 탓에 억울한 일을 참 많이 겪는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집안 출신의 나, 마리아에게 솔직히 죽음 자체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까짓것 줄초상을 치른다고 해도 사후세계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나는 당연히 그런 게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치릴로에게 “나중에 만나!” 인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잘 도착했다는 말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치릴로. 치릴로가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의 영혼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있잖아, 내가 죽어 보니까 말이야. 여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라는 말을 전하러 오지도 못할 만큼,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아기가 죽은 9월이 오면 엄마는 넋을 놓았다. 아침밥을 차리고는 정작 본인은 한 술도 뜨지 않고 우리 남매가 젓가락 놀리며 밥 먹는 모습도 보지 않았다. 엄마는 식탁을 등지고 앉아 아파트 옥상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단발머리 엄마의 작고 검은 뒤통수. 그 뒤통수를 보며 열 살의 나는 된장찌개 후후 불고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고 무장아찌는 잘 못 집었다. 하루는 막막한 뒤통수에 대고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엄마, 엄마는 몇 살까지 살고 싶어?”
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질문했다. 엄마가 “80!”이라고 답한다면 엄마가 80살이 될 때까지는 안심하고 있으려고, 그런 계산을 마친 터였다. 마흔몇 살 엄마가 답했다.
“60?”
60은 내게 너무 작은 숫자였다. 너무 작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숫자. 나는 엄마 없는 나의 스물아홉, 나의 서른을 상상하게 한 엄마가 대뜸 미웠다. 고작 60이라니, 엄마는 대체 얼마나 슬픈 사람인 걸까, 우리가 있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슬픈 사람을 보는 일도 참 슬픈 일.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미련하게 먹은 아침밥을 다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