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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설교/성경연구
· ISBN : 9788947803717
· 쪽수 : 380쪽
· 출판일 : 2021-03-24
책 소개
목차
서문
1권 서문
2권 서문
제1권 목회 설교집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은혜 속에서 강하고
금과 은은 내게 없어도
고독이 뜻하는 것
사랑의 승리
벳새다
오호라, 나의 형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내 아들아
나와 내 집
6·25의 신앙적 교훈
너희는 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다가서야 할 한 걸음
주께서 주신 결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일체의 비결
겨울의 교훈
성탄의 예고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아직 늦지 않았다
제2권 절기 설교집
|신년 주일| 정월 초하루
|교회 창립 기념 주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3·1절 기념 주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대심방 주일| 대심방의 의의
|종려 주일| 승리의 입성
|부활절| 나를 기념하라
|부활절| 부활의 확증
|부활절|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
|부활절| 부활의 그리스도
|성령 강림절| 성령 강림의 준비
|성령 강림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어린이 주일| 자녀를 어떻게 기를까
|어린이 주일| 어린이와 예수
|어버이 주일| 룻의 봉양
|어버이 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가정 주일|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가정 주일| 너와 네 집
|6·25 기념 주일 | 나의 말한 그 민족
|광복절 기념 주일| 자유와 해방
|광복절 기념 주일| 자기 해방
|총회 주일| 총회의 중요성
|총동원 전도 주일| 총동원 주일
|중추절 주일| 추석 명절에
|종교 개혁 주일| 종교 개혁과 기독교의 본질
|추수 감사절| 하나님께 감사하고
|추수 감사절| 감사하며 송축할지어다
|성서 주일| 성경의 가치
|성서 주일|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
|성탄절| 첫 성탄
|성탄절| 성탄의 깊은 뜻
|송년 주일|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랑의 줄!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호 11:4).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이끌리어 주의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목회 강단에 서서 30년. 부흥회 인도 500여 교회.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줄의 연결이었습니다. 그동안 때와 곳에 따라 어려움도 있었으나 한결같은 성령의 위로와 모인 성도들의 간절한 은혜 속에서 받아들여진 말씀의 전달이었고, 또한 증거하는 중에 스스로의 믿음을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말씀의 역사 곧 사랑의 줄이었습니다.
설교란 듣는 청중을 의식하면서 준비하고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활자화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읽는 분들을 위해서 따로 설교 원고를 작성한다는 데에는 시간적인 부담을 느껴서 그동안 설교집의 발간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 유학차 파리로 떠나는 맏딸이 기념 봉사로 설교집의 발간을 서둘러, 녹음된 것을 지면으로 옮기고 또다시 원고지에 정리한 딸의 정성에 의해 『사랑의 줄』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제가 담임하고 있는 한강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에 설교한 것을 녹음해 두었던 것입니다. 녹음된 내용을 되도록 그대로 옮겨 봅니다. 그때그때 은혜로 받아 주신 교우 여러분의 목자를 위한 기도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랑의 줄로 이어져 가는 생활을 기원합니다.
_ 제1권(목회 설교집) 서문
사랑의 줄!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호 11:4).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이끌리어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생활에 굴곡이 많습니다.
베드로처럼 바다 위라도 걷는 담대함이 있었는가 하면 한 비자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비열하고 나약한 생활을 되풀이해 온 것 같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눅 22:32).
넘어질 때마다 붙드시고 약해질 때마다 보살펴 주신 사랑의 눈길이요, 사랑의 줄이었습니다.
그중에도 절기 때가 되면 그때그때 절기 따라 받은바 은혜가 되새겨지고 해이해졌던 믿음이 다시 불일 듯 감격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설교 제1집 ‘목회 설교집’이 출간된 후 여러분이 ‘절기 설교집’ 출간을 권고해 주실 때마다 저 나름대로 느껴본 것이 이것이고, 예수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사람 되어 세상에 오신 뜻깊은 성탄절을 맞으면서 『사랑의 줄』 제2권이 빛을 보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겠습니다.
이 설교집이 나오기까지 온 정성을 기울여 주신 교우들과 가족, 그리고 알뜰하게 원고 정리 및 교정을 보아 주신 권순범 형제와 멀리 불란서 파리에서 책표지를 아담하게 장정하여 보내 준 신성희 집사에게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이 설교집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줄로 이어져 가는 승리의 생활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_ 제2권(절기 설교집) 서문
나의 멍에를 메고
| 마태복음 11장 28~30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생활에 지치고 어려운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의 말씀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란 말은 외적으로 오는 생활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힘겨워 피곤한 육신의 생활, 때로는 경제적으로 오는 어려움도 있고 때로는 육체적인 질병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 인생을 향하여 ‘수고한 자들아 이리로 오라’고 초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 진 자”는 내적인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것, 정신적인 고통, 때로는 종교적으로 오는 허무감과 허탈감 속에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내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종교 생활이란 쉼을 얻는 평안의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지 말라고 금지되어 있는 사항이 무려 360여 가지나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얽매인, 규제되어 있는,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게로 오너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주님께서 모두 책임져 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냥 안식하라’고 하시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어려움도 있고 고통을 주는 여건들도 있고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내가 주겠노라. 이는 내가 세상을, 이 모든 어려움을 친히 이기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평안함. 쉼을 얻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의 어깨에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내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와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멍에의 원뜻을 헬라 원어에서 찾아보면 ‘길들여진다’, ‘배운다’, ‘가르친 대로 순종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 멍에는 쉽고”란 말은 내가 길들이고 내가 배워 주며 나에게 순종하는 길은 쉬운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쉽다는 말 속에는 잘 맞는다, 꼭 맞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입니다. 유대의 전설에 의하면 특별히 예수님은 멍에를 잘 깎았다고 합니다. 유대의 멍에는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끌도록 T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소에 맞도록 치수를 재어서 깎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양복점이나 양장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듯이 소에게 멍에를 씌우려고 하면 그 소를 끌고 와서 치수를 재고 가봉을 하여서 꼭 맞게 맞춘다는 것입니다. 소에게 멍에가 맞지 않으면 목에 상처가 생기고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전설에는 예수님 집의 목공소 앞에 ‘내가 깎아 만든 멍에는 잘 맞습니다’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설 속의 얘기지만 요셉이 목수였는데 예수님은 그 요셉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므로 멍에를 깎는 것을 보며 자랐을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멍에를 깎아 본 경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의 멍에는 쉽다’란 말 속에는 ‘나의 멍에는 너에게 꼭 맞는다’라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멍에가 맞는다는 것은 마치 새에 있어서 날개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내게는 이런 것을 달아 놓으셔서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하셨나요?” 하고 원망하는 새는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이 날개로 드높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 그 자체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느껴지는 짐의 무게가 문제입니다. 내게 유익이 없고, 이득이 안 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적더라도 부담이 되고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내게 유익한 금덩어리라고 할 때는 크면 클수록 좋고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좋은 법입니다. 그런데 무거울수록 기쁨이 오고 크면 클수록 즐거운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맡겨진 일감은 내게 있어 몸에 꼭 맞는 옷과 같고 나를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게 해 주는 날개와도 같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즐거움을 줄 때는 땀을 흘리며 애를 쓰면서도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피곤한 줄 모르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되면 시간은 가지도 않거니와 공연히 힘이 들고 짜증만 나는 법입니다.
유대 나라에서 소에게 멍에를 씌울 때는 꼭 어미 소 옆에 송아지도 같이 멍에를 메게 합니다. T자로 되어 있는 이쪽에는 어미 소를 메어 끌게 하고 저쪽에는 송아지를 메어 끌게 하는데 쟁기는 어미 소 쪽의 멍에에 매어 있으므로 실상 밭을 가는 것은 어미 소입니다. 이 송아지는 어미 소 곁에서 엄마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피곤한 줄 모르고 쟁기를 끌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바로 이런 멍에입니다. 이쪽 한끝은 예수님이 메시고 다른 한끝에 나를 메어서, 어려운 모든 문제는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시지만 나는 그 곁에 함께 있어 예수님의 멍에를 배우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쉼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이는 메시아의 특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마음’이란 단어는 원어로 해석해 보면 ‘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즉 “너희 마음이”에서 마음은 어떤 뜻일까요? 이는 ‘생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심장으로, 우리 인간의 마음을 생명으로 표현하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이를 해부학적으로 또는 언어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기로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얻으려면 뿌리에서부터 접붙이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롬 11:17).
마음과 마음.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되는 것. 원래 우리는 돌감람나무인데 돌감람나무는 아무리 애를 써보아야 돌감람나무 열매밖에 맺을 수가 없으니 맛있는 열매를 맺으려면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비슷한 교훈 중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나에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고 너희가 나를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생활에 시달리고 고통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자녀들아, 내게로 오라.’ 참감람나무 뿌리에 접붙이고 그 가지가 이어질 때 곧 너희가 쉼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편안히 앉거나 누워 있는 쉼이 아니고 새 힘을 얻음으로써 땀 흘리고 애써서 얻는 만족스럽고도 보람된 삶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새 힘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면서 참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