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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52768575
· 쪽수 : 304쪽
책 소개
목차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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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외르크는 간혹 말을 멈추어가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것도 크리스티아네가 아침에 보면서 놀랐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산만한 손동작을 섞어가면서. “감옥에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알고 싶다고 했나? 내 삶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 내가 그 삶에서 단절되어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삶에 대한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그 삶의 가치가 점점 줄어든다는 느낌, 그런 거였어.”
“사람을 처음 죽이고 나서 기분이 어땠느냐고. 그 경험으로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웠느냐고 물었어.” 이번에는 잉게보르크도 끼어들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이제는, 울리히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외르크에게 향했다. 외르크는 마치 말을 하려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말에 힘을 실으려는 것처럼 두 손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두 손을 들었다가 또다시 내려놓았다.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전쟁에선 쏘고 죽이는 게 일이야. 그럴 땐 어떤 기분이어야 하지? 거기서 뭘 배워야 하지? 우린 전쟁 중이었어. 그래서 난 총을 쐈고 죽였어. 이제 만족해?”
“자네가 처음 죽인 사람이 자동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던 여자 아니었나? 자네가 은행을 습격한 뒤 도주할 때 말이야.”
외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자는 차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차를 내놓지 않았어. 바보 같은 짓이었지. 나도 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 내가 그 여자와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나와 전쟁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반박하지는 마. 전쟁 중에는 군인만 죽는 게 아냐.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황혼이 낮을 물리고 밤을 불러들이듯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가 현재로 걸어 들어왔다. 기억은 이미 지나갔고, 현재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 생생함만은 결코 현재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은 자신들이 늙었으면서도 동시에 젊게 느껴졌다. 이 감정도 고향에 온 것처럼 아늑했다. 크리스티아네가 마침내 촛불을 켰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다시 또렷이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상대의 늙은 얼굴에서 방금 기억 속에서 만난 젊은 얼굴을 다시 알아보고 싶었다. 아직 마음속에 젊음을 간직하고 있고, 젊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젊음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젊음이 지나간 것만은 되돌릴 수 없었다. 우수(憂愁)가 그들의 가슴을 채웠고, 서로와 그들 자신에 대한 연민이 가슴속에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