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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문학
· ISBN : 9788953153806
· 쪽수 : 192쪽
· 출판일 : 2026-09-28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_ 하나님을 향한 노래, 안식으로의 초대(이종태 교수)
part 1 방황했던 날들, 내 영혼의 몸부림
- 방황했던 지난날을 참회하며
나를 품으신 주님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1 크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작고 무력한 나의 시작을 고백합니다
︒ 나를 지으신 하나님과 철없던 어린 시절의 악한 본성
2 나는 악을 행하는 것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 훔친 것은 배가 아니라 금지된 쾌락이었다
3 진리를 찾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 거짓된 빛, 마니교에 빠지다
4 사랑하는 이를 잃고 무너졌습니다
︒ 친구의 죽음 앞에서 마주한 사랑과 허무
5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 거짓 스승을 지나 새로운 길을 찾아서
6 진리의 문 앞에서도 나는 머뭇거렸습니다
︒ 부와 명예, 익숙한 욕망을 놓지 못하는 마음
7 어둠 속에서 마침내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 악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을 발견하다
8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집어 들고 읽어라
9 마침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 세례,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정
part 2 너무 늦게 사랑한 하나님
- 내 안의 솔직한 욕망과 죄의 흔적을 꺼내 놓으며
나를 찾아내신 주님을 고백합니다.
10 너무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기억과 욕망을 지나 발견한 참된 사랑
part 3 시간을 넘어 영원한 안식으로
-시간에 쫓기는 불안을 넘어 마침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11. 모든 시작과 끝이 당신 안에 있습니다
︒ 시간 너머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
12 태초에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신 창조주
13 마침내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
︒ 사랑으로 완성되는 영원한 안식
덧붙이는 글_ 흩어진 나를 모아, 영원한 안식으로(이종태 교수)
책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노래, 안식으로의 초대
교회사 속 수많은 저작 가운데, 성도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제목은 다 알지만 끝까지 읽어 낸 사람은 드문 책’을 꼽으라면 단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일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과 4세기 고대 지중해 세계의 철학적·신학적배경 때문에, 많은 이들이 큰 결심을 하고 첫 장을 열었다가도 얼마 못 가 책장을 덮곤 합니다.
하지만 《고백록》은 결코 신학교 강의실에서 학문적으로만 다루어져야 할 딱딱한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이 책은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뜨거운 영혼의 고백이자, 문학과 철학의 향기까지 짙게 배어 있는 영성 고전입니다. 읽다가 난해한 구절을 만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선의 모든 뼈를 다 발라 먹지 못해도 부드러운 살코기만 뜯어 먹으면 충분한 자양분을 얻듯이, 난해한 신학적 논의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울리는 고백의 한 줄 한 줄에서 충분한 영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고전 라이트의 《고백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가장 빛나는 정수(精髓)들을 마주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을 내디뎌 보시기를 권합니다.
《고백록》은 어떤 책인가
《고백록》은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43세 무렵(397년경), 세례를 받고 회심한 지 약 11년이 흐른 원숙한 시기에 3년에 걸쳐 쓴 책입니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자서전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 영적 증언(간증)문입니다.
책은 총 13권(오늘날의 1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제9권: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젊은 날의 방황과 지적 갈망을 거쳐 386년 밀라노의 정원(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회심하기까지, 그리고 오스티아 항구 도시에서 어머니 모니카와 더불어 가졌던 영적 체험과, 모친과의 사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기억’을 다룹니다.
제10권: 저술 당시 43세 주교로서 자신의 내면과 심리를 성찰하며, 유명한 ‘기억의 신비’를 탐구하여 ‘현재 직관’을 보여 줍니다.
제11~제13권: 시간과 영원의 신비, 창세기 천지창조의 영적 의미를 해설하며,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원한 안식’을 사유하는 ‘미래 기대’로 웅장하게 마무리됩니다.
참회를 넘어 사랑과 찬양의 노래로
우리는 흔히 ‘고백(라틴어로 Confessio, 콘페시오)’이라는 말을 과거의 부끄러운 죄를 털어놓는 참회나 반성 정도로 좁게 생각하곤 합니다. 예전에 이 책이 《참회록》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던 탓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전통에서 ‘콘페시오’는 죄의 고백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찬양의 고백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실제로 《고백록》의 첫 문장은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라는 찬양으로 시작하여, 맨 마지막 13권에서는 거룩한 기도의 마침인 “아멘”으로 끝납니다. 책 전체가 하나님을 2인칭인 ‘당신(Tu/You)’으로 부르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기도의 형식’으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영성 문학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제3자로 두고 하는 말(Talk about God)은 우리 머리에 신학 지식으로 저장될 뿐이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실어 드리는 말(Talk to God)은 그 말을 (엿)듣는 이들의 영혼에 불을 지피고 신앙을 일깨워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나 독자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를 일깨우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고백록》 전체를 꿰뚫는 단 하나의 문장을 꼽으라면, 제1권 시작 부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일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빚어졌기에, 그 참된 쉼의 자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하며 쉼이 없을(restless)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명예와 지식, 쾌락을 끌어모아도 영혼의 깊은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소책자에 선별된 핵심 구절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겪었던 뼈아픈 방황과 실패,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한 은혜의 기록들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조급하지 않게 느긋이, 마음에 머물게 하며 묵상해 보십시오. 진지하게 고뇌하고 진솔하게 고백했던 한 순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 역시 참된 평화와 안식의 자리로 걸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추천의 글에서)
내 영혼의 집은
당신을 모시기에 너무 작습니다
내 영혼의 집은 당신을 모시기에 너무 작습니다.
이 집을 넓혀 주셔서 당신이 들어오실 수 있게 하소서. 이 집은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고쳐 주소서.
그 안에는 당신을 노하시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외에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죄에서도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나를 원수에게서 지켜 주소서.
나는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내 죄를 당신께 고백했을 때, 당신은 내 죄악을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의 판단을 두고 당신과 다투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속일까 두려워, 날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를 살피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판단을 두고 당신과 다투지 않겠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낱낱이 헤아리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1. 5. 6)
내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크고,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인간은 주님이 지으신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죽음에는 우리의 죄와 교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조차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를 깨우십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내가 한 가지를 알고 싶습니다.
무엇이 먼저일까요? 주님을 먼저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먼저 주님을 찬양해야 할까요?
또 주님을 먼저 알아야 할까요, 아니면 주님을 부르는 것이 먼저일까요?
생각해 보면,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존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과정에서 비로소 주님을 알아 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누군가 전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찾는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나는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부르겠습니다.
주님을 부르며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말씀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그 설교자(Preacher, 아우구스티누스가 설교를 듣고 회심한 그의 스승 암브로시우스를 말함-역주)를 통해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내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셨기 때문입니다.(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