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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작가론
· ISBN : 9788956658094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25-12-20
목차
책을 펴내며 / 『천재 시인, 백광홍을 다시 읽는다』를 펴내며 / 6
제1장 기봉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
1. 기봉의 품성 / 16
2. 기봉의 구인(求仁) 정신(1) / 29
3. 기봉의 구인(求仁) 정신(2) / 59
4. 기봉의 위대한 꿈, ‘안빈낙도·풍광월제’ / 89
5. 치열한 극기(克己)·수양(修養) 궁행에 최선 / 118
6. 구도자(求道者) 희구하다 / 149
7. 부(賦) ‘동지(冬至)’와 기봉의 인생·우주론 / 202
제2장 기봉의 부활을 위하여
1. 글을 시작하며 / 284
2. 사후, 대체로 부정 평가되다 / 295
1) 기녀의 시 2수, 오해의 단초 / 295
2) 조우인·김득신, 기봉의 인식과 평가 / 302
3. 조선 시단(詩壇)의 평가 / 314
1) 백광훈, 기봉 ‘관서별곡’ 최초 증언 / 314
2) 조선 시단의 기봉 소개 / 319
3) 기봉의 긍정 평가 사례 / 335
4) 장흥부, 기봉의 평가 / 364
4. 기봉, 다시 부활돼야 한다 / 368
1) 관서 평사 기봉 … 사실적 정황 이해 필요 / 368
2) 기봉 사후 343년 만에 『기봉집』 간행 / 384
3) 현대 … 기봉 백광홍 재평가 되다 / 393
5. 기봉은 장흥문학의 선구자 / 401
1) 기봉, ‘1문4문장’의 주역 / 401
2) ‘기산팔문장’, 기봉이 선도 / 406
3) 관서별곡, 장흥가사 문학의 뿌리 / 420
3) 기봉, ‘장흥문학’의 선구자 / 429
6. 글을 마치며 / 433
제3장 기봉의 편린을 기억하며
1. 기봉·옥봉, 둘 다 ‘조선 팔문장’ / 440
1) 팔문장의 구분 / 440
2) 팔문장, 『선조실록』에 등재 / 442
2. 사후의 기봉과 옥봉 / 456
3. 기봉의 가계와 상계 / 472
1) 백광홍의 가계(家系) / 472
2) 출사하지 않은 풍잠 백광안 / 480
3) 기봉 윗대 큰 인물 … 백수장·백세례 배출 / 490
4. 기봉 백광홍의 연보 / 497
에필로그 / 515
저자소개
책속에서
유학자로서, 구도자로서, 시인으로서, 선비[군자(君子)]로서 기봉의 품성은 어땠을까.
기봉의 품성에 대한 평가의 전거는 호불호가 갈렸다.
기봉의 사후 평가
- 이수광·신흠·고상안의 평가
조선 중기 학자로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했던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평안 평사 기봉은) … 영변의 기생을 아꼈다. 병으로 인해 체직되어 돌아온 뒤에 관서로 놀러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에서, ‘그대 백상루(百祥樓) 아래 가서 물어보면, 아가씨 중 응당 몽강남(夢江南)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얼마 못가서 세상을 떴다. 대저 뜻 높은 선비로 여자에게 마음에 이끌려 이처럼 마음을 쏟았지만, (이는) ‘십 년 만에 한 번 양주 꿈을 깨고 보니(十年一覺楊州夢)’라고 한 것과 또한 다르다 하겠다. 지금도 관서의 기생들은 (기봉의) 풍류를 사모하여 백서기(白書記) 백서기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수광이 여기서, “십 년 만에 한번 양주 꿈을 깨고 보니 十年一覺楊州夢”라는 시구를 인용하고 이것과 다르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틈만 나면 기생집에 드나들어 구설이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의미다. 즉 두목이 방탕으로 놀이 삼아 기생집에 드나든 데 반해, 기봉은 기녀를 참으로 마음을 주어 사랑했다는 뜻이다. 두목에게는 이른바 기녀 놀음으로 “박정하다는 기생집 평판뿐이었는데(占得靑樓薄倖名)” 이와 달리 이수광은 “지금도 관서의 기생들은 그 풍류를 사모하여, “백서기(白書記), 백서기라고 한다.”면서 두목과 기봉을 비교한 것이다. 따라서 이수광은 기봉이 기녀를 사랑한 것에 대하여 두목의 방탕한 기생집 출입과는 다른 차원 즉 기봉의 진정한 사랑, 참으로 마음을 주며 사랑했을 것이라는 기봉의 진정한 사랑과 풍류를 칭송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흠(申欽,1566~1628)은 그의 저서 『상촌집』에서 “(기봉은) … 서관(西關 평양)에서 주색에 빠져 노닐다가 끝내는 그 길로 죽었다 在西關. 溺於花酒. 竟以此死.”(『상촌집』 ‘상촌선생집 제60권, 청창연담하晴窓軟談下’)며 기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출신이었던 고상안(高尙顔,1553~ 1623)도 “… 만약 그가 몇 년을 더 수양을 쌓았다면 그 재능은 시단에 독보적일 수 있었다. 관서의 평사였다. 그런데 요물(妖物)에 현혹되어 스스로 그 장수를 재촉하였다.”고 평가했다.
이수광의 표현처럼 기봉이 기녀와의 사랑도 진심을 다한 사랑을 했을 만큼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였을까. 신흠·고상안 등의 표현처럼 난봉꾼에 불과했을까.
결론으로 말하면, 기봉은 고매한 품성을 갖춘 정통 유학자요 진정한 군자행(君子行)을 실천 궁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직필, 기봉의 평가
“죽을 때까지 숨어 맑게 자기 닦는 일을 기원했다”
홍직필(洪直弼)은 『기봉집』에 실린 ‘묘갈명 병서(墓碣銘 幷序)’에서 기봉의 품성을 능히 추정할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를 언급하였다.
“공(기봉)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뜻과 학업이 우뚝하였다. 효성과 우애에 바탕을 두고, 내행(內行)을 순수히 갖추었다. 성동(成童)이 되고부터 과거 시험 공부하기를 즐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독서란 장차 자기를 위하려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나아가 벼슬에 오르는 것에만 뜻을 두어, 한갓 심장적구(尋章摘句)만 일삼는다면 무엇에 힘입어 경륜을 펼쳐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에 이르게 할 것인가?’ 이에 일재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오로지 성리학에 정심(精深)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두루 캐낸 뒤에야 (독서를) 그만두었다.”면서 “성장하면서 내행(內行)을 순수히 갖추었다.”, “과거 시험 공부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성리학에 정심(精深)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두루 캐냈다.”라고 지적하고, 기봉이 학업에서 내면에 대한 수양과 당대의 핵심 가치관인 유학・성리학에 대한 경전의 깊은 뜻을 정심으로 궁구했다고 밝혔다.
또 공에 대해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워, 마음을 오로지 하여 배움에 향하였다. 公天資近道, 專心向學雅言”라고 평한 홍직필은 그래서 “… 공은 숨어 맑게 스스로를 닦으면서 장차 죽을 때까지 계속할 듯하였는데,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바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공은 학문을 함에 있어 상실무본(尙實務本) 즉 실질을 숭상하고 바탕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일찍이 ‘좌우명’을 지어 이렇게 말하였다. ‘부(富)는 구할 수가 없고, 귀(貴)도 도모할 수가 없다. 구하지도 않고 꾀하지도 않으며 하늘 뜻에 따라 하리. 가난해도 근심할 것 없고, 천하여도 슬퍼할 것 없네. 담담히 빈 집에서 광풍제월(光風霽月) 벗삼으리. 내가 누구를 믿을까? 저 높으신 상제(上帝)일세.”라고 하면서 “숨어(살며) 맑게 스스로를 닦았다(장차 죽을 때까지 계속할 듯하였다).” “부귀(富貴)도 구하지도 꾀하지도 않고 … 가난해도 근심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 뜻에 따라 (살았다)”, “가난한, 무욕의 선비도를 실천 궁행하였다.”고 밝혔다.
홍직필은 이러한 기봉에 대한 총평 같은 것으로 서두 부문에서 양응정(梁應鼎)의 만사를 인용하며, [양응정(梁應鼎)은 …가정 병신년에 공이 세상을 뜨자 일재(一齋) 선생께서 통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대유(기봉)의 재주와 행실이 그 짝을 보기 힘들었는데, 불행히 명이 짧으니 능히 크게 펴지 못함이 애석하구나.”라고 말하고, ‘짝을 보기 힘들 만큼 재주(문학성)와 행실(바른 行實)이 뛰어났다.’는 데 방점을 둔 평을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조상화 찬 遺像贊’에서 “일재(一齋) 선생 스승 삼아 / 문장으로 이름 났네. / 배움(학문)에 연원(淵源, 근원) 있어 / 벼리(뼈대)를 꽉 잡았지. / 홀(笏)을 들고 조정에 들어서면 선비들이 뒤따랐지. / 남을 비방하지 않으니 원망받을 일 없네. 宗師一齋 鳴世文章 學有淵源 提挈維綱 立朝正笏 士類有依 訐直則無 怨仇用希.”라고 읊었다.
기봉의 5년 연상이었던 기대승은 ‘초상화 찬 遺像贊’을 통해 단적으로 기봉의 인품을 말했다. 특히 ‘벼리를 꽉 잡았다’, ‘남을 비방하지 않으니 원망 받을 일 없네’의 두 구절은 기봉이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품을 소유했음을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봉의 친구로 알려진 김홍도(金弘度,1524∼1557)는 기봉이 관서로 부임할 때 전별문을 써 주었는데, 여기에는 기봉의 품성을 추정케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대는 나의 벗이다. 내가 일찍이 평소 그대를 살펴보니 귀한 자질을 타고나서 터럭만큼의 찌꺼기가 없어, (그대는) 가는 것으로 오는 것도 알 수 있다. 선배의 수치를 (바르고 곧은) 그대가 아니고 씻을 자가 누구겠는가? 서쪽 지방에도 눈이 있어 반드시 고쳐 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김홍도는 기봉이 “터럭만큼의 찌꺼기가 없이 곧고 바른 사람”으로 평가했다. 뒷 부문의 “선배의 수치를 그대가 아니고 씻을 자가 누구겠는가?”라는 말은, 이 전별문 앞 부문에서 “근래 들어 변방에 경보를 알리는 북소리가 그치지 않고, 그곳 백성은 수렁에 빠짐을 근심한다. 그런데도 변방의 장수가 군대를 가지고 노니는 것은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 近來邊 塞, 有警桴鼓未息, 南北之民, 溝壑是虞, 而邊將玩兵, 良可歎已.”라고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기봉이 이들 선배(장수)들의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바로 잡기를 충고하는 말이다.
기봉과 과거 급제 동반으로(1549년 식년시), 누구보다 기봉과 친교가 깊었던 홍진(洪縝)은 기봉이 갑작스럽게 별세한 후 지은 ‘만사(挽詞)’에서, 친구 기봉 시인을 먼저 보냄으로써 참담해진 심사를 토로하였다. 또 기봉의 도의(道義)와 절조 등 훌륭한 인품(사람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만사에는 기봉을 기억하는 홍진의 진심이 담긴 아픔이 곳곳에 배어있는 듯했다. 만사 주석에 “기유년(1549년)에 함께 (기봉과) 급제했고, 동갑이다. 호는 연봉이다. 詞[洪縝 己酉同蓮榜 又同庚 號蓮峯.”고 적혀 있다.
(상략)
그대는 도의가 있어 / 子有道義兮
맑은 절조 깨끗하게 닦았지 / 淸修雅操
그대 문장은 / 子之文章
천고에 남을 보석 / 千古遺寶
마음가짐 화평하여 / 其秉心和平
사람들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었지 / 則人無怨惡
(그대) 성품은 바르고 곧아서 / 其植性公直
선비의 훌륭한 본보기[表儀]가 되었지 / 則士有表儀
이제는 그대 있지 않으니 / 今不復有子兮
내 누구를 좇을 것이랴 / 吾安從之
사람들은 그대 위해 곡을 하지만 / 人爲子哭兮
나는 이 시대를 위해 곡을 하노라 / 我哭斯時
그대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을 땐 / 子來兮下土
어찌 기약해 둔 바가 없었으리 / 豈無其期
(그대) 용마루[棟隆]가 될 마음을 품고 / 懷棟隆之具兮
만인[蒼生]이 기댈 바를 자임했었지 / 任蒼生之倚
세상에서 할 수 없음 알아 떠나니 / 知世之不可以去兮
그 흰 바탕은 온전히 했구려 / 全其素履
그대가 밑바닥에 있을 때부터 / 自子之在根荄兮
나는 그 인품을 알아보았지 / 余知其品矣
(중략)
(목숨은) 이미 스스로 얻을 수 없고 / 己不自得兮
그럼에도 풍토(평안도 땅)를 살펴 대비치 못했음에랴 / 况不審備乎風土
그대 죽음 병 때문이라고 말이 많지만 / 人多異說以病君兮
다만 그 운명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구려 / 殊不知其命
나는 그대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 辱我之同年生兮
나란히 (과거시험)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았네 / 又聯萼之有幸
소매 여며 (정중히) 그대의 말 들으며 / 斂袵聽君兮
식견이 그대만 못하여 부끄러워했었지 / 愧賞識之不似
(그럼에도) 깊은 은혜 손을 끌어 함께 힘을 쏟았으나 / 感荷提携以勉勵兮
(지금은) 그대 모습 그 목소리 접할 길이 없구려 / 義不忝子音容
그 따스함은 영영 멀어졌구려! / 永隔其溫溫
이 참담한 심정 견딜 길이 없으니 / 羌不堪其慘毒
그대 어찌 이리 바람 앞에 날 목메게 하나요? / 子焉如兮使我臨風而鳴咽
함께 공부하며 늘 서로 격려하고 권장하고 배려하였던 절친으로, 돈독한 우애로서 교감했을 기봉의 친구 홍진은 기봉 시인을 “도의가 있어, 맑은 절조를 깨끗하게 닦았던”, “마음가짐이 화평하여 사람들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었던”, “성품이 바르고 곧아 선비의 훌륭한 본보기[表儀]가 되었던”, “식견이 자신보다 윗길이었음에도 늘 겸손하고 정중히 말하고 자신을 이끌고 권장하고 독려하고 삶을 공유하였던” 친구였으며, 용마루[棟隆]가 될 웅지를 품고 있었고 만인을 위해 크게 헌신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기봉의 품성, 정신, 철학 …
수많은 부(賦) 작품에 투영
기봉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는 유가(儒家)의 사상이 개인·사회의 기본 윤리, 나아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굳어 있었다. 기봉은 유학(儒學)을 공부한 유학자며 유학에서 제시한 구도(求道)와 구인(求仁)을 궁리, 궁행하던 구도자요 군자였으며 시문(詩文)을 즐겨 쓰던 시인이었다.
그가 비록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짧은 삶 속에서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봉집(岐峯集)』을 귀중한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16세기 초반 조선 팔도를 들어 올렸던 팔문장(八文章)이요, 기행가사의 효시로 평가받은 ‘관서별곡(關西別曲)’이라는 명작을 남긴 당대의 천재 시인이었다.
흔히 작품은 작가의 정신과 사람됨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는 그 작품 속에 그 작가의 정신과 사람의 품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봉은 『기봉집』 부장편(賦長篇)에 9편의 부(賦)를 남겼다. 부(賦)는 비교적 짧게 정형화된 시문과 달리, 오늘날의 산문시 같은 형식으로 작가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담기가 용이하다. 특히 기봉의 부(賦) 작품의 경우, 해당 부(賦)에서 자기가 전개하는 어떤 주제의 내용에 비추어, 반드시 자아의 입장이나 처지를 고백하며 기술하였다.
예컨대 구인(求仁)을 하나의 주제로 내세운 부(賦) 작품의 경우, 과연 지금의 나의 구인(求仁)의 상태는 어떠한가. 나는 어떻게 구인을 실천해 왔으며, 지금의 나는 어떤 처지인가 하는 현재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글에서는 거짓이나 과장된 사실을 기록할 수는 없다. 글은 시인의 순수한 고백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賦) 작품에서 기봉 시인의 인격이며 품성도, 그가 추구하고 궁리했던 사상이며 철학의 세계도 능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기봉집』을 통해 기봉을 공부하며, 기봉의 부(賦) 작품들을 고찰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느 시대든 치열하게 자기 삶을 영위해간다. 기봉 시인도 그러한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이렇게 살아간 사람들은 대부분은 ‘마치 신들린 듯이’, 혹은 ‘절로 신명 나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기봉 시인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특별하다 할 정도로 치열했다. 이는 그가 남긴 작품들이 웅변해주고도 남는다. 그의 그러한 삶은 참으로 역동(力動)이요 열정(熱情)이었다. 기봉은 신(神, 천성天性)이 자기 안에, 자기가 신(神, 天道) 안에 있는 물아일체(物我一體), 혼연일체(渾然一體)의 무아적(無我的)인 경지를 기대하고 꿈꾸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기봉 시인은 유독 그런 면에서 참으로 대표적인 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생 불사른 공부에서, 미칠 듯 매달린 신독(愼獨)과 극기(克己)의 자기 수련에서, 치열한 구도·구인의 궁리와 궁행에서, 그 어디에서든 무엇을 하든 자기 삶의 대부분을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실천 궁행하였던 고매한 선비였으며 고독한 구도자요 정도(正道)의 자기 생을 불태워간 시인이었다.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기봉 시인의 삶을, 그의 품성을, 그의 정신과 철학을 더듬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