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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57994702
· 쪽수 : 424쪽
· 출판일 : 2022-05-30
책 소개
목차
추천사
프롤로그
서론
제1부 소예언서 각 권의 쓸모
01 호세아서의 쓸모
02 요엘서의 쓸모
03 아모스서의 쓸모
04 오바댜서의 쓸모
05 요나서의 쓸모
06 미가서의 쓸모
07 나훔서의 쓸모
08 하박국서의 쓸모
09 스바냐서의 쓸모
10 학개서의 쓸모
11 스가랴서의 쓸모
12 말라기서의 쓸모
제2부 소예언서 각 권에서의 쓸모
01 궁금한 호세아 선지자의 결혼
02 요엘 2:23의 ‘엩-함모레 리쯔다카’ 에 대한 개역개정 번역 재고
03 누가 예언하지 않겠소? :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
04 형제끼리 싸울 순 있어도 등에 칼을 꽂을 수는 없다: 에돔 심판에 관한 오바댜의 묵시
05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 요나는 어디에 있었어야 했나?
06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찐이 되기 위한 몸부림: 미가 6:6-8
07 요나서와 완전 다른 나훔서에서의 하나님
08 알고 나면 쉽게 하지 못할 기도: 하박국 3:2의 원래 의미를 찾아서
09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스바냐 3:17
10 학개서의 초대, 불편함이 아닌 흥분된 감동으로
11 오실 메시야를 예표했던 사람들: 스가랴 선지자가 본 두 환상
12 십일조 싱크홀에서 말라기서 벗어나기
에필로그
저자소개
책속에서
창녀를 사랑한다는 스토리, 파격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영화적 요소로는 클리셰입니다. 병태와 거지 민우가 사창가 여자 벙어리 춘자를 구해 내는 고래사냥 영화와 살짝 닮았어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영화광이라면 호세아서에서 그래도 식스 센스(sixth sense)급 반전을 기대했을 텐데 그게 없네요. 살짝 맥 빠질 겁니다. 아마도 화를 버럭 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여자가 어디 고멜 하나뿐이더냐! 바보~ 똥멍청이!” 호세아 선지자에게요. 한 여자에 대한 순애보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고구마 열 개를 물 한 모금 없이 꾸역꾸역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됩니다. 불륜에 빠져 바람난 고멜이라는 여자보다, 그 여자에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더 화가 날지 모릅니다. 1부 호세아서의 쓸모 중에서)
01
호세아서의 쓸모
이런 바보 사랑 또 어디 있어요?
창녀를 사랑한다는 스토리, 파격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영화적 요소로는 클리셰입니다. 병태와 거지 민우가 사창가 여자 벙어리 춘자를 구해 내는 <고래사냥> 영화와 살짝 닮았어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영화광이라면 호세아서에서 그래도 식스 센스(sixth sense)급 반전을 기대했을 텐데 그게 없네요. 살짝 맥 빠질 겁니다. 아마도 화를 버럭 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여자가 어디 고멜 하나뿐이더냐! 바보~ 똥멍청이!" 호세아 선지자에게요. 한 여자에 대한 순애보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고구마 열 개를 물 한 모금 없이 꾸역꾸역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됩니다. 불륜에 빠져 바람난 고멜이라는 여자보다, 그 여자에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더 화가 날지 모릅니다.
왜 주인공 호세아는 고멜에게 집착했을까요? 연출가이자 작가인 하나님이 "끝까지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겠지요. 마음 같아서는 벌써 헤어지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당시 이혼이 어려웠던 것도 아닙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도 아닌 땅의 티끌로 취급받던 시대였거든요. 호세아가 고멜하고 이혼한다고 해서 호세아를 뭐라 말할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문화권에서 아내의 지위는 인격체라기보다는 남편 재산의 일부로 여김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일찍이 모세 율법은 남편이 아내를 간음 이외의 경우에는 마음대로 내버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고멜의 외도는 이혼당할 분~~~~명한 사유가 되는 행위였습니다.
자식 셋을 낳았습니다. 그런데요. 그 세 명의 자식 모두 호세아 선지자의 자식일까, 하는 의심이 드네요. 고멜, 그렇다면 진짜 무서운 여자지요. 남편을 감쪽같이 속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첫째는 호세아의 자식이 분명할 겁니다. 결혼 생활 1-2년은 부딪치는 시간을 보내지만, 그래도 그 기간은 불붙는 로맨스 기간이잖아요. 둘째와 셋째에 의심이 갑니다. 하나님이 둘째를 ??로루하마??(hDmDjur aøl, 긍휼히 여김 받음 없음), 셋째를 ??로암미??(yI;mAo aøl, 내 백성이 아님)라고 지어 주셨습니다(1:6, 9). 요즘 같으면 유전자 검사 하나로 간단히 친자 확인을 끝낼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그때는 그게 불가능했겠지요. 우리의 친자 확인은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입니다.
히브리 본문에서 보면 유일하게 첫째 이스르엘에 대해서만 "그(호세아)에게(wøl/로) 아들을 낳으매"(1:3, NE;b wøl_dRlE;tAw rAhA;tAw/밧타하르 밧텔레드-로 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둘째와 셋째에게는 그런 문구가 없는 것이죠.
호세아는 둘째와 셋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친자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것과 같으니까요. 순간 호세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꼭지 돌아갔을 겁니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 흥신소를 찾았을까요. 현장에서 잡아 버리면 고멜을 돌에 맞아 죽게 하는 즉결 심판이 가능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드래요. 만일 있다면 천연기념물처럼 길이길이 잘 모셔야 하겠습니다. 호세아서는 순애보의 끝판왕입니다. 마치 누군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고전 사랑학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암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보며 가슴 아프게 써 내려간 도종환의 시 <접시꽃 당신> 일부입니다. 호세아서가 사랑 이야기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 불륜에 빠진 아내를 다시 맞아들인다는 얘기가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바보, 똥멍청이 얘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호세아가 지금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저는 그에게 아리랑 노래를 가르쳐 줄 겁니다.
"날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워낙 얘기가 진지해서 가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호세아서는 실제 있었던 리얼 스토리입니다. 어느 정신 나간 한 남자의 순애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진짜였다니까요. 호세아서는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거로 시작합니다. 고멜이 결혼한 여자였는지 몸을 팔고 있던 창녀였는지 아니면 음란 끼가 있었던 여자였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클레오파트라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 좀 엉뚱한가요. 남자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 같네요. 얼마나 예뻤길래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했을까, 싶습니다. 여성분들도 궁금해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오늘날 미(美)의 기준에서 예쁜 얼굴은 아니었을 거라네요. 고멜이 남자들을 홀릴만한 미색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좌우간 고멜은 이성에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헤픈 여자였지요.
그런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호세아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기가 막힙니다. 히브리 발음으로는 호쉐아(oEvwøh)인데 예수님의 이름과 뜻이 같습니다. ??구원하다 (save)입니다. ??구원(救援)藍繭遮¬ 말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을까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 살린다鸞遮¬ 뜻입니다. 호세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고멜을 구원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이름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 1:21).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고 싶으셨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이방 신을 따라갔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준 율법을 버렸습니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지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찐사랑하시는 이야기, 하나님의 찐러브 스토리, 이것이 바로 호세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소예언서(12 예언서)에 호세아서가 있는 쓸모고요. 하나님은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지 보여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즉 호세아의 아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보 사랑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예수님 역할을 맡으면 간지 나겠지요. 호세아 선지자가 바람난 아내를 용서하는 남편 역할의 드라마 배우로 하나님 마음을 잠깐 전하는 거였다면, 괜찮았을 거예요. 그건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호세아는 연출가 하나님이 맡겨 주신 배역을 잘 감당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종영되지 않습니다. 호세아에게 고멜 남편은 배역이 아니었고 실제였습니다. 아내 고멜은 남편 호세아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진짜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걸요. 툭하면 외박하고 몇 달을 가출합니다. 찾고 보면, 고멜이 발견되는 곳에 항상 딴 남자가 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처럼 바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요?
호세아서의 쓸모는 우리에게 어떤 남자와 또는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연애학 개론이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위한 가이드 책은 아닙니다. 호세아서의 쓸모는 우리가 고멜과 진배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바보 같은 순애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바보라고 부르면 신성모독이 될까요? 하나님이 바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떠나지 않고,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는 바보 사랑을 하셨습니다.
진짜 회개 맞아요?
호세아서는 "난 바보처럼 호세아와 같이 살지 않을 테야"라고 결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남편을 버리고 외도한 고멜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걸 알고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고멜이 우리라니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죄의식이 조금 덜할 수도 있겠군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나 자신을 숨기는 건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멜이 바로 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고멜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사역할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는 열왕기 저자에 의해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는 크게 성공한 왕이었습니다(왕하 14:23-25). 당시 나라가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거든요. 여로보암 2세는 41년이나 통치했습니다(왕하 14:23). 굉장했죠. 그러니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찾는 신앙보단 쾌락을 추구했겠죠. 고멜의 문란한 삶은 바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며 율법에서 떠난 배교와 방종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고멜이 바로 나였음을 알게 된다면 호세아서의 쓸모가 제대로 작동된 겁니다. 고멜의 모습에서 자신의 수치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신실하지 못한 나의 삶, 그런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이 들킬 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라는 결심을 합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죠.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면피용 멘트였습니다.
호세아 6장을 보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정성 없는 회개는 습관이었습니다. "야훼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라고 말하며 제사 지냈지만, 며칠 못 갔습니다. 언제나 구호에 그쳤죠. 그때뿐이었습니다. 당장의 위기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걸 보고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할 때마다 씁쓸함을 느끼셨습니다.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드라마가 글로벌 흥행을 이룬 것은 드라마 자체의 탄탄한 줄거리 파워도 있겠지만, 코로나라는 위기 상황에서 보는 이들의 감정이입이 어떤 드라마보다 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훈아는 “오늘이라는 날이 고맙기는 하지만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라며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리 힘들어!” 테스 형을 찾으며 노래합니다. 희망 없는 내일을 오늘로 또다시 맞아야 하는 현실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먹을 것은 있으니까요. (1부 요엘서의 쓸모 중에서)